지난 15일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열린 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대졸 신입사원들의 초봉 삭감이 논의됐다.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임금을 낮춰 고용을 늘리는 '잡 셰어링'(Job Sharing) 방안을 강구하라"고 말했다. 회의에 참여한 김기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고용 증대를 위해 공기업부터 대졸 초임을 낮추는 방안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주요 국가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 대비 금융업계의 대졸 초임을 비교해 보면 미국은 61%, 일본은 135%, 한국은 207%로 우리 나라가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한번 검토해 보자"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경제 브레인들이 모여 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나온 지적에 대통령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고용을 늘린다는 명분도 있으니 이번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 삭감은 정책적으로 제법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또 정말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이 과도한 수준이고, 그 잉여분을 새로운 고용으로 돌릴 수 있다면 요즘 같은 고실업 시기에 국가적으로 시도해 볼 만한 정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따져보자. 우리나라의 대졸 신입사원들은 국제 기준보다 얼마나 '행복한' 임금을 받고 있을까.
한국의 대졸 초임은 2236만원
위 표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지난 2007년에 발표한 '우리나라와 선진 3국의 경제수준과 대졸 초임'자료에 최근의 환율을 적용한 것이다.
노동부가 2007년 발표한 사업체근로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졸 초임 평균은 2235만 8천원. 이를 달러로 환산해 1인당 GDP와 비교해보면 그 비율이(1.20) 미국(0.944)이나 일본(0.654), 영국(0.918)보다 높다. 이것이 전광우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일각에서 '한국의 대졸 초임은 높은 편'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각국의 임금 상승률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연공급 체계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일본과 비교해 보자.
한국경영자총협회의 2007년 자료에 따르면 대졸 초임은 우리나라가 더 높으나, 승진에 따른 임금 상승폭은 일본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대졸 초임과 대리 초임의 격차는 35.4%였으며, 이후 직급이 상승함에 따라 평균 16.4%의 상승률을 나타내었고, 일본의 대졸 초임과 주사(대리) 초임의 격차는 58.2%, 이후 직급이 상승함에 따라 평균 18.5% 상승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대졸 초임만이 높은 수준이고 승진을 할수록 임금의 수준은 떨어진다는 얘기다.
높은 대졸 초임보다 더 높은 한국 물가단순히 임금과 1인당 GDP와 비교한 것만 가지고 국제 기준을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임금이 실질적인 생활비의 역할을 하는 만큼, 임금 수준을 평가할 때에는 당연히 해당 국가의 물가수준이 고려돼야 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서 발표한 '2008년 세계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생활비지수(cost-of-living index·2007년 기준)' 항목에서 122.4를 기록했다. 이는 조사대상 중 최하위인 55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IMD의 생활비지수는 미국 뉴욕시를 기준(100)으로 세계 주요 국가 대도시들의 상품·서비스·주거비 등 실질 생활비 수준을 지수화해서 국가별로 평가한 것으로, 조사대상 55개국의 평균은 86.3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소비자는 같은 수준의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뉴욕의 소비자보다는 20% 이상, 세계 평균보다는 40%이상 비용을 더 지불한다는 의미이다.
옆에 있는 표는 최근 일본과 우리나라의 생활 필수품 가격을 비교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생활 필수품 물가는 대략 일본의 0.7배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양국의 대졸 초임은 원화로 환산해 각각 2236만 8천원, 4442만 5천원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1인당 GDP비율로 봤을 때 한국의 대졸 초임은 높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 돈을 가지고 생활하기는 세계적으로 물가가 높기로 소문난 일본보다 훨씬 어려운 셈이다. 일본에 유학중인 대학생 김정은(27)씨는 "일본에서 물가가 높은 편인 도쿄에서도 아르바이트만 열심히 하면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다"며 "체감 물가는 되레 한국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고물가는 최근 들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금융위기와 맞물린 국제 유가 및 곡물가격 하락에도 물가가 거의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지난해 7월 5.9%였던 물가상승률은 11월 4.5%로 1.4%포인트 내려가는 데 그쳤다. 이에 반해 같은 기간 미국은 5.6%에서 1.1%로, 일본은 2.3%에서 1.0%로, 중국은 6.3%에서 2.4%로 하락하는 등, 주요 선진국들의 물가 상승률은 작년에 비해 절반 이하의 큰 폭으로 떨어졌다.
특히 작년에 많이 오른 후 가격이 내리지 않은 품목들은 식료품, 유류 등으로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 간장(24.6%), 된장(17.1%), 돼지고기(17.1%), 국수(42.6%), 우유(14.0%)등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으며 대표 서민 음식인 자장면이 13.1%, 짬뽕 11.6%, 피자 11.1%, 김밥이 17.0% 오르고 라면도 15.0% 나 올라 모두 10% 이상의 급등세를 보였다. 휘발유 값은 국제 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12.4% 상승률을 기록했다. 경유는 31.8%, 액화석유가스(LPG)도 32.3% 올랐다.
높은 대졸 임금... 살 만하냐고?굳이 임금을 깎지 않아도 스스로 워킹 푸어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20~30대 직장인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워킹 푸어(working poor)는 정규직 또는 비정규직에 상관없이 풀타임으로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고 병원 입원이나 실직 등의 문제만 생기면 곧장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최근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은 20~3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자신이 일하는 빈곤계층인 워킹 푸어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을 진행했다. 이 질문에 설문에 참여한 919명 중 65.2%가 '예'라고 응답했다.
이들이 스스로를 워킹 푸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연봉이 적어서'(37.7%)였고 두 번째로 큰 이유는 '생활비가 빠듯해서'(15.9%)였다. 서울에 사는 대졸 직장인 1년 차인 조상규(27·가명)씨는 "연봉이 2200만원 정도인데 부모님이 지방에 계셔서 서울에서 혼자 살려면 빠듯한 수준"이라며 "(연봉에 비해)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대졸 직장인 1년차 이인희(25·가명)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연봉은 1950만원으로 업계에서는 보통 수준이지만 대학 학자금 대출 갚으면서 생활하려면 거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
'경제대통령'은 어디로 갔나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약으로 연간 6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작년 한해 동안 만들어낸 일자리는 고작 7만 7천개. 7.2%의 청년 실업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2008년 11월 청년 실업률은 0.3% 줄어든 6.9%에 그쳤다. 그리고 이제는 물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저 고용 진작을 위해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을 줄이자고 말하고 있다.
애당초 국민들이 '경제대통령'에게 기대했던 것은 이런 '꼼수'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도 최소 30만개 정도는 감당해낼 복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연간 60만개의 일자리를 약속했을 것이리라. 부디 이 대통령이 이제는 이런 '장난' 그만 치고 '경제대통령'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