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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지장보살,  지옥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포기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
용문사 지장보살, 지옥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포기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 ⓒ 백찬홍

지장보살, 지옥의 모든 중생 구제위해 성불마저 포기

불교에는 석가여래의 인도로 지옥을 다녀온 후 고통스러워 하는 중생들의 모습을 보고 "죄과로 인해 고통 받는 육도중생들을 모두 해탈하게 한 후 성불하겠노라"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는 성불할 수 있는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나 지옥중생까지 모두 성불하도록 교화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성불하겠다 맹세했는데 모든 중생의 성불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실상 성불을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장보살의 크고 원대한 자비심은 불교의 법칙마저 깨뜨릴 정도다. 불교에서는 정한 업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의 운명은 전생의 업에 의해 이미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든 업보에 의해 결정된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장보살에게 귀의하여 해탈을 구하면 악도에서 벗어나 극락에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에게 적용된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면서 그곳에 들어가는 중생들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또는 지옥 자체를 파괴해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천상이나 극락으로 인도한다. 지장신앙은 지옥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후손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다. 관음보살이 현생의 고통을 없애준다면 지장보살은 죽은 후의 삶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육도윤회를 관장하는 구세주로서 한국사찰에서는 명부전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지장보살과 관련한 특별한 의식이 많이 전래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매년 7월 24일 거행되는 지장재와 백중날에 거행되는 우란분회라고 할 수 있다. 백중인 7월 15일은 참회의 날로서 시방삼세의 부처와 스님들에게 온갖 음식을 바치고 기원하면서 죽은 어버이들의 극락왕생을 소원하고 있다. 이 같은 신앙으로 지장보살은 죽은 이들을 위해 드리는 49재의 참배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는 지장보살이 자비로서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기독교에도 지장보살과 같은 일을 하는 존재가 있을까?! 우선 교리 상으로 불가능하다. 죽은 자가 일단 천국과 지옥으로 가면 최후의 심판 전까지 빠져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는 부처와 보살이 시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예수, 성령의 역할이 세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가 지옥(저승)에 내려갔다는 사도신경의 내용과 죽은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서구절을 통해 저승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신경, 예수 십자가형 이후 지옥으로 내려갔다고 고백

예수 파안대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예수파안대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제공
천주교와 개신교 공히 사도신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지옥(저승)으로 내려갔다는 내용이 있다. 다만 한국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내용이 없다. 1894년 장로교 우리 말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디옥에 나리샤'(지옥에 내리사)로, 1905년에는 '음부에 나리셧더니'(음부에 내리셨더니)라로 표현했으나,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발행한 합동찬송가부터는 내용이 삭제됐다.

사도신경에 예수의 지옥에 내려간 부분이 들어간 것은 서기 6세기 이후 북아프리카와 프랑스 지역 신앙 고백문이 수집되면서부터였고, 12세기에 이르러 전체 내용이 확정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국 교회가 현재 사용하는 사도신경에서 '지옥' 부분을 삭제한 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이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개념은 원래 유대 전통에는 없었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단지 스올(Sheol, 음부, 저승)로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상상했던 저승 스올은 죽음 이후 누구나 가는 곳으로 두려운 곳이긴 했지만 사람들이 상상하기 쉬운 무서운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은 아니었다. 스올에서 받게 되는 형벌이란 구더기, 갈증, 불앞에서 고통당하는 정도였다.

유대인들의 부족신에서 출발한 야훼(여호와)는 살아있는 자들의 신이었기에 구약성서에서 스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야훼가 스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야훼는 엄격한 존재로서 스올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일찍 죽은 자를 꺼내주거나 스올에 있는 자를 용서했다는 내용은 없다. 유대교가 천국과 지옥 등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이후 페르시아 치하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천주교, 연옥을 통해 사후세계 통치할 수 있는 권한가져

서기 1세기부터 그리스·로마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같은 좀 더 정교한 사후세계를 만들어 냈다. 일단 죽어 저승에 간 사람은 생전에 지은 죄에 따라 예수의 마지막 심판 전에 1차적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산 수용된다. 지옥에 갇힌 인간들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으며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천주교는 지옥 외에 연옥을 추가했다. 연옥은 천국에 갈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지옥에 보내기도 어중간한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연옥설은 1336년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교서를 통해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되었다.

프랑스의 중세 전문가 르 고프는 그의 저서 <연옥의 탄생>에서 연옥의 발명으로 교회가 현세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 시공간인 저승에 대한 권리를 신과 나눠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교회는 현실의 괴로움 때문에 자살로 천국으로 직행하려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통제함으로써 죽은 자들이 죽어서도 교회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편히 잠들거나 다른 곳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재정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신자들은 사후 자신과 가족들이 천국으로 직행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사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여  영혼 구제 사업을 위해 써주기를 원했다. 때로는 교회 당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도 했으며, 미사 때 '연옥의 영혼을 위한 연보 접시'를 돌려 "연옥 구제"라는 특별 계정에 배당했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면 죄는 사면되지만 그 죄에 따른 징벌은 연옥에서 치러야 하며 이승에서 빌어주는 기도·자선 등의 보속을 통해 사라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연옥개념은 비록 교회가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현세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신자들에게 희망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르 고프는 연옥의 이미지가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연옥의 존재 자체는 천국을 향한 낙관적인 전망과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천주교에서는 이승에 있는 사람들의 공로와 보살과 같은 존재인 성인들에게 빌면 죽은 자들이 일찍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존재들은 여전히 최후의 심판 때까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너무 가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옥으로 내려간 예수에게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지장보살과 예수, 지옥중생 구제위해 함께 노력할 것

신약성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20절이나 4장 6절에는 예수가 지옥에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예수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또 4장 6절에는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옥에 있는 영들'은 예수의 심판이 있기 전 지옥에 있는 죄인들을 말한다. 예수가 사도신경의 내용처럼 지옥에 갔다면 앞의 구절처럼 영원한 형벌로 고통 받는 죄인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장보살을 만나 반갑게 포옹을 하고 나중에 올 죄인들의 구원을 부탁했을 것이다.

이 내용은 '예수천국·불신지옥'을 내세우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어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무서운 심판자로 그리는 전통적인 기독교교리는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수천 년 전의 세계관과 관습으로 사람들을 정죄해 지옥으로 보내고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지나치게 선악시비만 가리는 1차원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서 정죄하고 있는 탐식·탐욕·나태·교만·시기 같은 것들은 개인윤리의 문제이고 심리치유를 통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들로 지옥까지 갈 정도는 아니다. 지옥 문 앞에서 고뇌의 얼굴을 하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과거 종교가 남긴 유산이다. 만일 그가 지옥문 앞에서 지장보살과 예수를 만났다면 그는 금동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머금고 구원의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백찬홍 기자는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 운영위원,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 상임연구위원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이다.



#지장보살#예수#구원#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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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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