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복 떡집’. 이름부터 복스럽다 했더니 그 집 안주인의 인상이 복스럽다. 20년을 이 자리에서 떡 팔면서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김장을 해보지 않았다는 특별난 이력이 그녀를 말해준다. 이웃 상인들이 바쁜 떡집 안주인을 배려해서 직접 김장을 해서 가져다주었다고. 인근 이웃에게 인정받는 복스러움이니 두말해서 무엇하랴.
“아무리 기계화 되어도 송편만은 손으로 만들어요. 우리 ‘손 송편’이 안성에서 소문났지요. 그래서 설보다는 추석 명절에 손님이 워낙 많아 3줄씩 서서 기다려요.”입소문, 그것 참 무섭지 않던가. 장례식장, 결혼식장, 실버타운, 기업 등 굵직굵직한 곳에 떡을 납품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업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하게 떡의 맛으로 인해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란다. 그게 인연이 되어 올해 1월 13일에는 안성지역 ‘국회의원상’을 탔으니 그야말로 안성이 인정한 떡 맛인 게다.
이렇게 되기까지 어디 공짜가 있으랴. 내외가 줄기차게 앞만 보고 달려온 덕분이다. 20여년을 하루도 문을 닫지 않고 떡을 만들고 팔아 왔다. 물론 ‘임가공 협회’ 규정상 매월 2회 정도 소매 판매를 쉬기는 하지만, 쉬는 날에도 주문을 받고 굵직한 곳에는 납품하느라 바쁘단다. 매주 ‘금토일’에는 새벽 2시면 떡 맞추느라 일어나고, 평소에는 새벽 4시면 일어난다.
그렇게 남편은 매일 같이 성실하고 묵묵하게 떡을 만든다. 아내는 매일 같이 활발하고 친절하게 떡을 판다. 남편은 떡 만드는 기술자이고, 아내는 떡 파는 기술자다. 남편이 떡집 안쪽 일을, 아내가 바깥일을 도맡아 하는 셈이다. 두 사람의 성품상 역할 분담은 ‘딱’이다. 이런 걸 두고 ‘찰떡 궁합’이라고 할 게다.
“떡도 진화했어요. 처음 떡집 할 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손님들이 항상 ‘떡을 달게 해주세요’가 주문사항이었다면 지금은 ‘달게 하지 마세요’가 주된 주문사항이에요. 떡 종류도 ‘인절미, 절편, 꿀떡’의 종류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영양 찰떡, 두텁떡, 제리 모찌’ 등 종류도 다양하죠. 같은 떡이라도 색깔이 다양해요. ‘쑥 가루, 백년초, 호박가루’등 천연 소재로 색깔을 내니까요.”
떡집 안주인의 이러한 설명이 야무지다. 요즘 들어 부쩍 주부들이 아이들 간식 때문에 떡을 사러오는 것이 늘었다는 게 달라진 풍속도라는 것도 덧붙였다. 학교에서 빵보다는 떡으로 간식을 하라고 권유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오래된 떡집이다 보니 소매로 사가는 사람들은 할머니 손님이 많다. 30~40대 주부들이 이제 노년이 되어서도 자주 찾아온다. 할머니들이 오면 여기는 사랑방이 된다. 바빠서 다른 곳에 돌아다니지 못해도 시골마을 할머니들의 ‘소식 전하기’ 덕분에 앉아서 시골마을 소식들 두루 섭렵하게 된다. 마치 할머니들이 시골마을 리포터이고, 이집 안주인이 편집장인 셈이다. 안성 사랑방 뉴스 방송국이라 해도 좋겠다.
“5천원어치 빵이면 온 식구가 먹지 못하지만, 5천원어치 떡이면 온 식구가 먹을 수 있다는 게 떡의 매력이죠.”
안주인이 들려준 메시지가 가슴에 진하게 와닿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민족과 함께 했던 떡이 괜히 떡일까 싶어진다.
또한 떡 매장 지하에 설치된 떡 방앗간 벽에 ‘하면 된다’라는 문구는 이 집의 가훈이다. 가훈대로 그들은 그렇게 일구어냈다. 타향에 와서 떡 하나로 이 정도 했으면 대성공이다. 거기다가 입버릇처럼 “슬리퍼 신고 일하고 살아도 당당해요. 어딜 가도 떡 장사 한다고 먼저 밝히고 살아요”라고 말하는 그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누가 행복할까.
설이 며칠 남지 않은 떡집. 지하 방앗간에서 남편은 떡을 만들고 아내는 지상 떡집에서 떡을 파느라 하루가 짧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설 연휴 전인 23일 금요일 안성 복떡집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