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목적의 정당성을 위해 수단의 적정성을 잃는 우를 범한다. 물론 이조차 큰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용산 철거민 참사는 수단의 적정성은 물론이거니와 목적의 정당성조차 실종된 모습이었다. 경찰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강제진압의 목적 중 하나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처참한 결과를 보면 다수가 긍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 돌리기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개발본능과 파괴본능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공권력은 콘크리트를 부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 대상을 철거민으로 확대하였고, 이러한 행동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법치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미화하며 그 책임을 또다시 철거민에게 되돌렸다. 그들에게 개발을 방해하는 것은 아주 큰 죄악으로 비춰지며, 개발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가한 폭력은 개발의 이름아래 면죄를 받는다. 개발만을 외치며, 개발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한다고 얼마나 떠들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떠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으로 그 말들을 포장했는가. 그 외침이 또 다른 불행을 낳는 것임이 증명된 지금에도 그들은 개발의 환상을 버리지 않고 철거민들에게 이번 참사의 원망을 되돌리고 있다.
아직도 참사의 현장에는 희생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미안함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지 못한 애통함이 깨진 창문과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사이에 서려 있다. 한(恨)만 짊어지고 말없이 떠난 넋에게 더 이상의 폭력 공권력의 정당성을 외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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