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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벌판에 달랑 놓인 컨테이너에 촛불하나 켜놓고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촛불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허허벌판에 달랑 놓인 컨테이너에 촛불하나 켜놓고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촛불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 조찬현

까치설날인 섣달 그믐날입니다. 설날을 하루 앞두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습니다. 야근을 한 것이지요. 뭐 야근 이래봐야 몸으로 때운 것이지만 밤 추위가 여간해야지요. 따지고 보면 졸음과 추위와 밤새 싸움을 한 것입니다. 모두들 고향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에 전기도 없는 암흑천지에서 지내려니 오늘따라 여간 힘이 듭니다.

살기가 힘이 들어서인지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설자재를 훔쳐가거나 중장비에서 기름을 빼가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곳 현장은 현실 세상과는 좀 딴판입니다. 가까운 도로변에는 최근 전기가 들어와 가로등에 불을 밝히고 있지만 이곳은 빛과는 아직 거리가 멀기만 합니다.

허허벌판에 달랑 놓인 컨테이너에 촛불하나 켜놓고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촛불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지난 신정 때는 추위와 사투를 벌였었는데 그나마 이번에는 가스난로가 하나 있어서 언 몸을 녹일 수 있어 천만다행입니다. 난로의 열기에 창가에 김이 서립니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쇠창살이 눈에 들어옵니다. 문득 쇠창살에 갇혀있다는 생각에 흠칫 놀랐습니다.

지금쯤 귀성길에 오른 사람들은 설렘으로, 고향을 찾은 사람들은 반가움으로 들떠 있겠지요. 하필이면 이럴 때 ‘꿈에 본 내고향’ 노랫말이 떠올라 가슴이 짠해집니다. 멀리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화려한 불빛이 보입니다.

밖으로 나서면 움직임을 멈추고 웅크리고 있는 굴삭기가 괴물처럼 시커멓게 다가옵니다. 비닐천막을 뒤집어쓰고 기다랗게 누운 철근더미와 돌무더기가 섬뜩하게 달려듭니다. 암흑 속에서 홀로 마주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 그렇게 적군처럼 달려듭니다.

 한걸음만 나서면 빛의 세상인데 이곳은 암흑천지입니다. 저 멀리 줄지어 선 수은등 아래에서는 밤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한걸음만 나서면 빛의 세상인데 이곳은 암흑천지입니다. 저 멀리 줄지어 선 수은등 아래에서는 밤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 조찬현

 여수 산업단지의 불빛 속에서 수증기가 구름인양 피어오릅니다.
여수 산업단지의 불빛 속에서 수증기가 구름인양 피어오릅니다. ⓒ 조찬현

어둠과 빛의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곳입니다. 한걸음만 나서면 빛의 세상인데 이곳은 암흑천지입니다. 저 멀리 줄지어 선 수은등 아래에서는 밤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잠시만 있어도 살을 파고드는 추위가 매서운 밤입니다. 노출된 귀는 아예 감각이 무디어졌습니다. 깊게 파헤쳐진 땅바닥의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바깥세상을 돌아보고 컨테이너에 돌아와 멍하니 벽면을 바라봅니다. ‘예고 없는 산업재해! 예방이 안전입니다’ 표어의 글씨가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허기를 면하고자 비스킷 조각을 깨물자 입안에 갈증이 더해집니다. 종이컵 안에 들어앉은 양초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야위어갑니다. 애처롭게도 자꾸만 작아집니다.

여수 산업단지의 불빛 속에서 수증기가 구름인양 피어오릅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건 참 힘든 고통입니다. 몸부림입니다. 왜 이리도 겨울밤이 긴지 모르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해야 할 섣달그믐에 홀로 지낸다는 것이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봅니다.

밤을 이렇게 하얗게 지새워도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세상, 그래도 한편으로 이나마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이것이 비정규직이나 날품팔이의 한계입니다.

새벽 4시30분, 어디선가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이제 드디어 아침이 밝아오는가 봅니다. 올 겨울은 밤이 왜 이리도 긴지 모르겠습니다.


#설날#섣달 그믐#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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