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한국인도 있을까?
수년 전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도 도착하였는데 당연히(!)
우리 일행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관람하게 되었다.
얼추 빈민가에 다름 아닌 후미진 지역에
헛헛하게 서 있는 그 건물엔 하지만 김구 선생을 위시한 당대의 우리 자랑스런
열사와 의사들의 면면과 역사가 도도한 강물로 여전했다.
우린 가슴을 저미며 순국열사들께 묵념했고 ‘당신들이 계셨음에 우리가 지금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까지를 칭송하였음은 물론이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자면 반드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척점에서 덩달아 투영되기 마련이다. 젊디젊은 나이에 하지만 애국과 순국(殉國)의 길을 서슴없이 찾았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진정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안중근!
벌써 100년이나 지난 ‘하얼빈 의거’(1909년)건만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그러나 우린 누구라도 안중근 의사를 잊어보지 않았다. 아니 원천적으로 잊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게다.
그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 야욕 분쇄(粉碎)와 조국광복을 위해 그처럼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러했으되 이후 한반도는 이른바 서구열강들의 이해타산에 맞춘 그야말로 나눠먹기 식 배분에 따라 남북이 분단되는 실로 쓰라린 통한의 아픔을 맞는다.
작년 10월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중국 하얼빈시에 위치한 조선민족예술관 내에 ‘안중근의사 전시실’을 현지에서 재개관한 바 있다.
지난 2006년 7월에 처음 개관한 이 전시실은 본래 조선민족예술관 1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 내용을 대폭 보완하고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 등을 위해 그처럼 2층으로 이전하여 재개관했다고 알려졌었다.
하여 참 잘 된 일이라고 환영한 바 있었는데 최근의 보도를 보자면 그만 크게 반동의 울분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는 올해, 그러나 안 의사의 넋은 일본의 마수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건 중국 당국에 대한 일본의 여전한 압력으로 말미암아 하얼빈 현지의 안 의사 숭모(崇慕)사업이 차질을 빚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안 의사 의거 97주년을 맞은 2006년엔 하얼빈시의 번화가인 중양다제(中央大街)의 백화점 앞에 세워졌던 안 의사 동상이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받은 후엔 중국 당국의 조치에 따라 그 자리서 철거되고 백화점 내의 지하 사무실로 옮겨져 있다는 현실은 가증스런 일본의 ‘만행’에 새삼 치를 떨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얼빈의 한인사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안 의사의 의거 현장인 하얼빈 역내 플랫폼에 안 의사 기념 표지석을 세우고 중양다제를 안중근로(路)로 만드는 등 숭모사업을 추진했단다.
하지만 현실은 답보(踏步) 내지는 되레 후퇴상태인 연유는 일본인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안 의사의 숭모사업을 교란하는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를 접하면서 ‘일본은 그처럼 집요하게 안 의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노력에 여전한데 과연 우리 정부는 무얼 했던가?’ 라는 의문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를 가지고 툭하면 몰강스럽게 대거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안중근 의사에게까지 마치 ‘백주의 테러’를 자행하는 듯한 일본(인)을 보자니 다시금 부아가 활화산으로 치솟았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 하는, 아니 안 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은 여전히 호의호식을 하는 반면 목숨을 버린 순국선열들의 자손들은 빈곤과 불학에 시달려온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임을 구태여 거론하진 않으련다.
다만 울고 있는 이에게 정작 필요한 건 손수건 한 장이 아니라 진정 기대어 울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의 강조라는 것이다.
지금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진정 기대어 울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원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통분, 과연 그 위로의 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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