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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소수 기득권 세력이 주도해 온 정치, 규제 완화와 개발주의 일변도의 정치는 유권자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특히 지역정치, 즉 '풀뿌리정치'가 전횡과 부패, 이권 등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다잡기 위해서는 풀뿌리부터 흔들어야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풀뿌리 정치를 살리기 위해 그간 정치의 대안을 고민해온 시민사회 모임 '좋은정치 씨앗들'과 공동으로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독자와 시민기자 여러분의 많은 제언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한국 경제는 독특하다. 한편으로 자랑스럽다면 자랑스럽다고 할 수도 있는 경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특별한 '압축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가 만만치가 않다. 

 

많은 학자들은 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이러한 압축성장이 자연스럽게 선진국 경제로 바뀌고, 민주주의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추세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테제는 이러한 희망을 반영한 사회적 테제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 전의 희망이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은 이러한 10년 전의 희망과는 다르다. 군사 정권에서도 없었던 철거민에 대한 살인적 경찰 작전이 그야말로 도심 한복판에서 버젓이 벌어졌다. 또한 대운하는 4대강 정비사업으로 간판만 바꾸어서 다시 살아 돌아왔고, 정부는 국채까지 발행해서 건설경기 살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강남 집값을 가난한 사람들의 돈으로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게 솔직하게 이유 하나만 대보라고 한다면 "이게 다 월드컵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최근의 스포츠 마케팅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쇼비니즘 마케팅의 강화라는 그런 점잖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월드컵이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독자들 중에 기초의원 선거나 단체장 선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어서 참여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선거에서 움직여본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아주 공교로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기초선거 주기와 월드컵 주기가 딱 일치하고, 대체적으로 지방선거가 한참 벌어질 때 축구 국가대표팀은 16강 예선전을 치르게 된다. 

 

2002년 한나라당이 완전 압승으로 끝난 지방선거는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경이적인 사건과 동시에 벌어졌다. 물론 그 해에는 노무현 열풍이 불면서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일단 형성된 지방자치에서의 특정정파 독점 구도는 지금까지 해체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의회에서 민주당과 당시 열린우리당이 연정을 해서 겨우 교섭단체를 꾸릴 수밖에 없던 당시의 상황은 쏠림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초 단위에서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지역은 대부분이 지방 토호들의 이익에 아주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고, 그 기간 동안 역설적으로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경제가 아주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기초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전라도 지역은 어떤가?

 

중앙정치에서는 여야로 나뉘어서 민주니 반민주니 갈라져 있는 것 같지만,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면 지역 자치라는 관점에서 이들은 모두 토호연합당이다. '개발연대'라고 부르면 딱 좋은 이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지역에 '개발 호재'를 만들려고 한다. 이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가장 간단하게 대운하를 살펴보자. 중앙에서는 토건경제의 해체라는 거창한 구호를 걸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울에서 하는 얘기이다. 민주당이 경인운하에 대해 보이는 어정쩡한 태도나 4대강 정비구간으로 영산강이 시범사업으로 된 것은 지역에서 민주당이 묵인해준 결과다.

 

그렇다면 지역에서는 실제로 토호들만 있고, 그 지역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태주의자들이나 혹은 문화 프로그램의 옹호자들이 없느냐, 정말로 지역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지역토호와 그들의 추종자만으로 주민들이 구성되어 있는가라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전국의 모든 지역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많은 지역에는 생태적 지역발전을 희망하는 시민단체들도 있고, 또 "내 고향 지키기"에 나름대로 매진하는 그야말로 '건전한 보수'들도 존재한다. 만약 한국의 지역이 지방토호들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서 일방통행했다면, 한국 경제는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고,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한 개발주의 열풍 지대가 되었을 것이다.

 

풀뿌리의 새로운 흐름이 서울을 바꾼다

 

어쨌든 전체적인 형국을 보자면, 2002년 지방선거에서 시작된 '토호 전성기'가 거꾸로 중앙을 움직여 지금의 정권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이 위에서만 바꾸자고 해서 그렇게 잘 바뀌지 않는다. 지방토호들의 권력을 해체하거나, 해체가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 견제는 할 수 있는 풀뿌리의 새로운 흐름 없이 서울에서의 그 어떤 노력도 '민중적', '대중적' 혹은 '전국적'이라는 수식어를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공중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여름의 촛불집회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이 지독할 정도의 중앙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서울에서 끝내리라! 이 슬픈 중앙형 구호들의 시대도 결국 해체돼야 한다. 지방에서 무엇인가 흐름이 생기지 않으면 이 시스템의 다음번 진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지방으로 내려가 '브나로드'를 다시 한 번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일들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지방 자치 그것도 풀뿌리 자치에서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들 역시 기계적인 계몽주의에 매몰되거나 아니면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다. 98년 IMF 때 발생한 귀농 운동 이후, 크게 간판을 걸지는 않았어도 일종의 브나로드라고 할 수 있는 하방운동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2010년, 다시 지방선거의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어김없이 월드컵도 찾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이번에야 말로 16강을" 외치면서 TV 앞에 앉아있는 동안, 경상도에서는 한나라당이, 전라도에서는 민주당이, 너무 쉬운 토호들이 주도하는 개발연합체가 재구성될 수도 있다. 이래서는 한국 경제가 분산형으로 바뀌기도 어렵다. 또한 명박 정부의 '삽질 경제'에 조그만 흠이라도 만들기 어렵다.

 

지역에서 토호식 개발정책이 지역발전의 모든 옵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서 있을 공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진짜 주민대표들이 개발연대의 핵심에 있는 지방토호들의 동토에서 '바늘 하나 꽂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문제투성이 기초자치를 아예 없애고, 어차피 한국은 중앙에서 그냥 통치하는 국가라고 광역지자체로 가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공간은 우리에게 맞지 않으니 치워버리자고 하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어려워도 지역에서, 그리고 풀뿌리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지방토호들의 땅값 올려주기에 불과한 토건시대가 해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한국에서 토호들과 외지 토지보유자의 세력이 가장 강성한 곳은 바로 제주도이다. 알짜 땅은 이미 외지인들이 다 가지고 있고, 그나마 남은 제주도 시민들은 토호들의 위세 앞에서 한 마디도 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제주도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자치의 상징이 아니라, 토호들과 외지인들이 결탁된 '개발 연대'에 대한 제어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녹지대비 전구 최고의 골프장 지역, 제주 군사항을 축으로 평화의 섬이 아니라 군대의 섬으로 변하는 추이, 광역 지자체 최고의 유아 아토피 발병률, 그리고 20대와 30대의 60% 가까이가 저신용으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인 지역, 그곳이 바로 우리의 제주도이다.

 

2010년 월드컵 장애물을 넘어서자

 

문제는 자치냐, 특별이냐, 그런 토호들이 갖다 붙인 허울만 좋은 명분이 아니라, 실제로 거주민이 살기에 편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조건을 어떻게 지역 생태와 결합시키면서 만들어 낼 것인가, 즉 토호의 눈이 아니라 주민의 눈으로 그 지역을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런 기초 정치의 지평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 말은 좋다. 이걸 누가 할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주민들이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공간이 열리는 시점이 4년마다의 주기인 지방선거 시점이고,  그게 바로 2010년이다. '개발'이라는 말 대신, '정주(human settlement)'라는 말이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관광'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정주'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역과 중앙이 공존할 수 있는 선진국 경제로 전환되는 새로운 진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놀러오기에 좋은 관광지"가 아니라 "살아보니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야 지역경제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이런 것을 구현한 '점'들이 '면'이 되는 날이 바로 선진국이 되는 날이리라.

 

불안하고 미약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많은 지역들에는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를 믿는 주민들이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2010년 월드컵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서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시점이다.

 

어렵다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버릴 때가 아니라, 지방토호들과 지역경제의 사활을 건 싸움을 한 번 해야할 때이다. 그래야 중앙정치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우석훈 기자는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입니다. 


태그:#풀뿌리, #정치, #지방토호, #지방선거, #좋은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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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제, 환경-자원 문제에 대한 전문가. 경제학 전공. 기후변화협약 UNFCCC 기술이전 전문가그룹 아시아지역 대표 이사 현대환경연구원 연구위원, 에너지관리공단 팀장 역임 한국생태경제연구회 창립회원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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