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달력을 뜯어내며 세월이 빠르다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벌써 입춘(立春)입니다. ‘봄이 온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훈훈해 옵니다. 지난 겨울엔 세상이 너무 하수상하고 시끄러워 서걱거리는 가슴에 봄소식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이른 새벽, 산이란 산은 안개가 자욱하고 짙은 먹빛으로 아침을 여는가 싶더니 해가 솟아오르자 맑은 빛이 방안 가득합니다. 쌀쌀한 기운이 아직 역력한데 맑고 투명한 햇살에 눈이 부셔옵니다.
봄빛은 생명으로 다가섭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빛으로 반짝입니다. 빛 속에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가슴을 열고 길고 깊은 호흡으로 빛과 생명을 들여마셔 봅니다.
입춘은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첫 번째 절기입니다.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어 언 땅이 몸을 풀고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기지개를 켜며 물고기가 얼음 밑에서 꼼지락거리기 시작합니다. 봄볕은 하루가 다르게 추위를 깎아내리고 얼음 속 몸을 풀어 자근자근 녹여냅니다.
산골짝 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와 개울물 구경을 가려고 차비를 차리자 흰둥이가 어느새 눈치를 채고 앞장을 섭니다. 봄은 개울물 소리로 귓밥을 씻어 내리다 강아지 콧등에 널름 내려와 앉습니다. 강아지는 간질거리는 콧등에 몸서리를 쳐대며 봄을 후벼 파냅니다. 길바닥, 돌 더미, 풀 속, 나무 밑둥을 허비적허비적, 급기야는 콧속 연골을 벌름거리며 봄 냄새를 끄집어냅니다.
산골짝 개울물, 겨우내 꽁꽁하던 얼음덩이가 몸을 풀며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하얀 얼음 살, 훈훈한 바람을 타고 개울물이 얼음 속을 뚫고 흘러내립니다. 참 맑고 깨끗합니다. 얼음물 녹아내리는 소리에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리고 숨쉬기가 점점 편안해집니다.
졸졸 한 물소리에 마음을 일으키고 몸을 되살리며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껴봅니다. 녹아내린 계곡물이 천상의 물처럼 고여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온몸의 세포가 들썽거립니다. 맑디맑은 푸른빛 도는 물웅덩이 속에 하느작거리는 작은 몸부림, ‘그냥 죽여주네요!’ 한마디가 저절로 새어나옵니다.
겨우내 주무시고 계시던 나무들 특히 버들강아지, 이제 곧 아쟁이 숨소리 같은 물소리가 온 몸에 스며들겠네요. 곧 잠을 깨고 기지개를 켜며 환 하디 환한 은총에 수액을 흘려보내겠네요.
입춘 전날은 ‘해넘이’라 부르고 밤엔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마귀를 쫓아냅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 계절은 물론 봄도 마음도 다 잊어버리고 산다는 소릴 자주 듣습니다. 봄도 오기 전에 봄을 미리 다 파먹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봄이 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치랴 싶습니다. 입춘 방을 써 집안의 기둥, 문설주에 붙여놓고 따사로운 햇살과 봄을 맞이하렵니다. 올해도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올 봄에도 따사로운 봄볕이 대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좋은 일들이 집안에 가득하기를 빌어봅니다.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온다’를 좋아합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겨우내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봄맞이 대청소를 하고 나면 행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만 같습니다.
저릿저릿 저려오는 훈훈한 바람, 해맑은 하늘, 보드라운 숨결... 이젠 완연한 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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