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유교 등의 사상 결합해 미야모토 무사시 등 길러내
중국집이나 분식집에 가면 흔히 딸려 나오는‘단무지’. 이 단무지를 예전에는 ‘다꾸앙이라고 불렀다. 이 ’다꾸앙‘은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서 도쿠가와 막부 초기를 살다간 다꾸앙 소호선사(1573~1645)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꾸앙 선사 말년의 어느 날 그가 주지로 있는 동해사(東海寺)에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이에미스가 찾아왔다. 둘이 담소를 즐기다가 마침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평소 못 보던 것을 먹어본 이에미스는 담백한 맛에 매료되어 이름을 물었으나 다꾸앙 선사는 이름은 없고 그냥 절에서 먹기 위해 무를 절인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에마스는 "참 맛이 별미인데 대사께서 고안하셨으니 앞으로 다꾸앙이라고 부릅시다”고 했다.
그때부터 단무지는 쇼군의 지시로 일본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구한말 일제 침략기 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다꾸앙 선사는 당시 막부의 실력자들과 상류층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를 했고 1638년 에도(지금의 동경)에 정착한 후 이에미쓰의 후원을 받아 동해사를 짓기도 했다.
시인이자 서예가·화가·차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특이하게도 검도와 선(禪)을 일치시는 일에 힘을 기울여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이라는 저술을 남겨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영향을 준 인물 중에는 검의 달인이면서 오륜서(五輪書)라는 병법서를 지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검술사범인 야규우 무네노리 등이 있다.
다꾸앙 선사의 부동지신묘록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이후 강항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황의 경(敬)사상까지 포괄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1. 마음이 바깥 경계에 의해 동하지 않는 지혜(不動智): 부동지는 불교의 중도, 즉 양변이 끊어진 마음의 상태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양변이란 바깥의 경계와 그에 따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항상 상대를 이뤄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이 허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지혜가 부동지이다(중략)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뺏기지 않기에, 천의 적을 상대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이것을 무심의 경지라고 한다. 만일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가면 틈이 생겨, 그 다음 차례의 칼에 맞게 된다. (중략)2. 부동지가 없어 상대의 움직임에 매여 놀아나는 것(無明住地煩惱, 무명지주번뇌)을 경계하라: 상대의 몸과 칼의 움직임에 내 마음이 속아 따라나섬으로써 틈을 보여 베이게 된다. 상대에게 속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의 행동을 이쪽에서 빼앗아 거꾸로 상대를 벨 수 있다. 3. 돌을 바위에 탁 치면 불꽃이 튀기듯이 반응하라: 그때 치는 동작과 불꽃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다. 마음이 사물에 반응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한다. 머뭇거리면 의식이 끼어들고, 의식이 끼어들면 좋고 싫음(好惡)의 양변이 생긴다.(중략) 양변이 생기면 마음은 묶인다. 따라서 즉각 반응하려면, 마음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로우려면 무엇에든 묶여있지 말아야 한다. 무심의 평정을 유지해야 언제 어디서나 가장 빠른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무사는 무심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중략)4. 마음을 두지 말라: 적의 몸이나 칼에 마음을 두면, 그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몸이나 칼에 두어도 역시 내 마음을 그것에 빼앗긴다. 적을 베야겠다는 데나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데 둔다 해도 역시 그것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고로, 마음은 둘 데가 없다.(중략)“마음을 단전(丹田)에 두고 꼭 지켜야 뺏기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듯하지만, 그것은 낮은 단계의 수행이다. 수행하고 연습하는 단계인 경자(敬字)의 마음경지(心境)다. 하나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맹자의 ‘흐트러진 마음을 되찾는다(求放心)’ 는 경지이다. 초보자는 마음이 산란하므로, 하나로 모으는 공부를 해야 한다. 5.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마음을 한 곳에 멈추면, 곧 뺏긴다. 유교의 수양법인 경(敬)을 주일무적(主一無適, 하나에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다)으로 해석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주군에 대한 태도는 이래야 한다. 불교의 일심불란(一心不亂)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불법에서는 주일무적 보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더 높이 친다.(중략)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마음을 모으는 것) 보다 소강절의 요방심(要放心, 마음을 모았다 다시 놓는 것)이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다. 자신 없는 사람은 ‘구방심(具放心, 방심을 갖춤)하고, 자신 있는 사람은 요방심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핀다. 마음을 놓아도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초심자는 구방심 하되, 향상자(向上者)는 요방심 하라. 중봉화상(中峰和尙)은 ‘구방심’ 하라고 말했다. (중략)도쿠가와 막부, 사무라이를 길들이기 위해 정신세계 강조다꾸앙 선사가 선을 검도와 결합시킨 것은 그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전국시대 혼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가 막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일본을 통일한 막부는 무장집단이었던 사무라이들을 평화의 시대에 안주시키기 위해 정신세계를 강조하는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에도막부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고 있던 다꾸앙 선사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실전보다는 좌선과 같은 정신집중의 수행, 불교적 철학의 핵심인 무아론 등을 설파하면서 무사도(武士道)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
다꾸앙의 가르침을 받은 야규우 무네노리는 병법가전서(兵法家傳書)를 저술하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유교적 이념에 의해 무술이 개인의 실천에 국한되지 않고 치국안민(治國安民)을 위한 법칙도 된다는 사상을 구축했다. 유교 · 불교의 이론을 도입해 논리와 수행론을 포함시키고 심법(心法)과 기법(技法)의 통일을 도모했다.
무네노리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유학자 야마가 소코, 구마자와 반잔, 가이바라 에키켄 등은 유학의 명분론을 통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특히 무사계급의 농공상에 대한 절대우위, 또 같은 무사계급안에서도 상 ·하의 엄격한 주종관계를 확립했다.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인륜도덕사상이 무사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음에 따라 무사도는 주종관계를 엄격히 유지하며 예속적인 생활을 강요하고 개개인의 개성적 발전을 무시하는 일본고유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근세 일본의 군인윤리의 덕목과 거의 일치했다. 1882년 1월 선포된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는 군인이 지켜야할 덕목으로 충절, 예의, 신의 등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덕목은 군인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이것은 일본 군국주의와 맞물려 신무사상(神武思想)으로 발전했다.
무사도 정신, 근대 일본을 통합시키는 길잡이 역할 신무사상은 무도의 근원적인 사상을 신국 일본의 황국사관에 일치시킨 것으로 군인을 비롯한 모든 국민은 신민(臣民)으로서 국가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신무사상은 청일전쟁 · 러일전쟁 · 2차 세계대전에서 확대·재생산되었고 결국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가장 파국적인 형태를 띠기도 했다.
명예와 신념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의 공직사회나 기업문화에도 반영되어 비리가 드러나거나 기업이 도산할 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폭력집단인 야쿠자도 이를 답습하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간 파쇼적 군국주의는 황국신민사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무사도 정신은 일본인을 하나로 묶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에도 막부 초반 피에 굶주린 사무라이를 길들이기 위해 시작한 무사도가 근대에 제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오히려 전쟁의 무기로 발전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다꾸앙 선사가 지하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통탄했을 수 도 있다. 다꾸앙 선사는 임종당시 유언(偈)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단지 ‘꿈일 뿐’이라는 말만 남기면서 자신을 위해 묘탑이나 위패, 시호도 필요 없고 오로지 절 뒷산에 흙으로 묻고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담백하고 소탈한 인물이었다.
그의 평소 생각과 사상은 일상에서는 단무지 같은 음식으로 나타났고 사회적으로는 다도(茶道)와 서예, 그림, 무사도를 통해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가 훗날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불상생이라는 불교의 최고 원칙에서 벗어나 “목숨은 꿈과 같고 베는 자와 베임을 당하는 자 모두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주장한 것은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 일 때 일본의 이름난 선사들은 열렬한 전쟁옹호자로서 활동했다. 브라이언 빅토리아(Brian Victoria)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전쟁과 선(Zen at War, 1998)에서 태평양 전쟁당시 고승으로 알려진 하라다 다이운은‘전쟁터에 몸을 던져 보지 않고 불법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고 야스타니 하쿠운은 다음과 같이 전쟁에서의 살생을 옹호했다고 말한다.(전쟁과 테러리즘, 데미언 키론, 허남결 번역, 불교평론 2007년 12월)
“당연히 우리는 죽여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싸워야 하고 적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자비와 충성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은 돕고 악은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생을 하는 순간 죽이되 죽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우리의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
이와 같은 ‘죽이되 죽이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은 다꾸앙 선사의 말과 일맥상통한 것이고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과 살인을 미화한 거룩한 전쟁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다꾸앙 선사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야모토 무사시같은 사무라이가 아닌 이상 승려가 살생의 도를 수립한 것은 금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가 검술의 도를 남기지 않고 단지 단무지를 만들었다 해도 전국시대 이래 피폐한 삶을 살았던 백성들의 삶을 헤아린 자비로운 승려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