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이화, 파주시민대학 3기' 동기생들의 판문점 안보견학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몹시 춥고 찬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음에도 마치 학창시절 수학여행 가는 들뜬 기분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파주시 금촌동 파주공설운동장에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버스에는 이미 먼저 온 동기생 몇 분이 있었습니다.
버스 앞 유리창에는 '파주시민대학 3기 판문점 안보견학'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종이 한 장이 붙여져 있었습니다. 먼저 온 몇 분에게 일일히 인사를 드리고 다음 장소인 문산읍사무소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 분과 합세를 하고 통일대교를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판문점 안보 견학은 작년 10월에 계획을 했지만 그동안 남북관계가 예민한 상태여서 언제 견학을 하게될지 미지수 였으나 작년 12월 초순경 군부대로 부터 견학을 해도 좋다는 날자를 지정을 받고 파주시민대학 동기생 100명 중 45명이 신청을 했으나 갑자기 개인 신상에 일이 있어 참석을 못한 몇 분을 제외한 32명이 판문점을 견학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현대그룹 고정주영 회장님이 통일의 소떼를 몰고 갔던 통일대교 입구에 도착. 군장병의 인원점검을 받고, 임진강 건너 마을인 통일촌에 도착을 하여 군내 출장소에서 출입증을 받아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북한이 '남침용으로 파 놓은 제3 땅굴'이었습니다.
일행 모두는 헬멧을 쓰고 제 3 땅굴을 견학을 했습니다. 땅굴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하기 때문에 사진기와 핸드폰은 보관함에 두고 가라는 안내 장병 말에 모두들 가방과 소지품을 보관함에 두고 내려갔습니다.
남침을 하기위해 파놓은 땅굴이라는 것에 분노보다는 이 땅굴을 파느라 북한병사들이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하는 안스러움(?)이 들었습니다. 땅굴의 높이는 약 1m70 였고, 세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너비였습니다.
땅굴을 견학한 뒤 통일촌 부녀회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남방한게선을 넘어 남북 회담 장소인 J.S.A(남북 공동경비구역)을 관람하기 위해 들른 곳에서 개인별 방문자 서약서(유엔사규정 551-5)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일일히 대조한 이후 군 버스로 모두 갈아탄 이후 판문점에 도착을 했습니다.(100% 신분확인. 예외없음. 문구)
그곳에서 안내 장병의 전방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전방에 보이는 북한군의 초소, 인공기 게양대, 개성 시가지 및 개성 공단도 보였습니다. 지척의 거리에서 바라본 북한은 평화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연합사 안내 장병이 설명을 마친후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남북 회담장소를 들어 가게 되는데 도보중에 사탕이나 껌을 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북쪽을 쳐다보고 손짓을 하거나 대열에서 이탈을 해서는 안됩니다. 질서 정연하게 두 줄로 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남북 회담장소 건물로 들어 서는데 썬그라스 낀 대여섯명의 잘생긴 연합사 장병들이 회담장 건물 주변에 태권도 동작의 부동자세로 마네킹처럼 서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의 경호차원이라고 했습니다. 긴장감이 돌고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남과북의 대치상황 속의 긴장감 때문이었습니다.
남북회담장소인 건물안 탁자 위에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마이크 북쪽은 북한, 남쪽은 남한지역이라는 병사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건물은 남북이 함께 쓰는 건물로서 북측에서 관광객이 올 경우 북한 병사가 안내를 하고, 남측에서 관광객이 올 경우 남측 병사가 안내를 한다고 했습니다.
북쪽에서 세워둔 인공기 게양대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라는 것과 게양대에 설치된 인공기 넓이만해도 근 50여평이 넘는다는 안내 장병의 설명에 모두들 실소를 머금기도 했습니다.
북측에서 주민들이 관광을 오는 경우는 극히 드믈며, 혹여 관광을 오더라도 북한주민의 1년 년봉의 해당되는 금액을 치루어야하기 때문에 러시아나 중국 관광객외에는 북쪽에서 관광을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판문점 옆에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와 1976년 8월 18일 일어났던 '8.18 북한군 도끼만행 사건의 현장의 흔적은 당시 상황을 기억나게 했습니다.(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필자는 군시절 첫휴가가 3개월이나 미루어졌었습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8.18북한군 도끼만행 사건'을 너무나 잘 기억을 하고 있던터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 ·경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중지를 요구하였고. 한국측 경비병들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도끼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는 중 ·경상을 입힌 사건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대한민국 전군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당시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했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국제연합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판문점 안보 견학을 모두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가까운곳에 있는대성동 초등학교에 들려 보고 싶었지만 일정에 없는 것이라 하여 그곳 초등학교에 들리지는 못하고 안내 장병의 설명으로 대신 했습니다.
남북공동경비구역(J.S.A)안에 있는 대성동 초등학교는 23명의 학생과 17명 교사가 있는데 모두 훌륭하신 선생님들이고, 아주 위대한 학생들만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해마다 졸업식에는 한 두명이어서 졸업생 전원이 푸짐한 상을 타곤 했답니다.
그러나 올해는 졸업생이 단 한 명 뿐이어서 아마도 리어커 두 대 분량의 푸짐한 상품을 타지 않을까 하는 안내 장병의 설명을 듣고 모두들 함박 웃음을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