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 전 호남지역에 있는 한 대학을 다녀왔습니다. 광주 전남 지역 대학생들과 일종의 간담회를 갖는 자리였지요. 그런데 간담회는 행사 자체를 저지하려는 일단의 학생들에 의한 소란행위로 인해 초반부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 오간 거친 대화들은 나를 매우 슬프게 했습니다. 대학 및 학생회 측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가 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들은 막무가내로 행사를 방해하면서 즉각 행사를 중단할 것과 심지어는 무릎 꿇고 사과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이 사회에서 자신들은 멋대로 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나는 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방치한 기성세대로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서슬이 퍼런 얼굴에서 ‘나는 개혁가야, 이 더러운 반동들아!’ 라는 표정을 읽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의아스러웠습니다. 이 사회의 정의와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폭력을 사용하고 또 남의 권리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요. 그리고 이런 경우는 비단 일부 학생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최근에는 국회에서 어떤 수염을 기른 분이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지요. 이들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배경에는 도덕적인 우월감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월감은 이 모순된 사회를 바로잡아야 할 개혁진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선민의식에서 나온다고 보여집니다. 설령 그들이 선민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남의 권리를 무시하고 인격을 짓밟으며 사회의 기본질서를 모독하는 그들의 행위는 도대체 정당한 것인가요. 상대방의 독선과 오만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자신들의 독선과 오만까지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삼는 소위 ‘개혁’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 번 봅시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개혁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개혁처럼 잘못 사용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1. 흔히 남한은 민주주의인데 북한은 공산주의라 합니다. 잘못된 대비입니다. 남한은 민주주의이고 북한은 독재 혹은 전제주의입니다. 남한은 자본주의이고 북한은 공산주의입니다. 민주 대 독재는 정치체제를 말하고,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는 경제체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뿐 아니라 학자들도 이를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진보 대 보수도 혼란스러운 부분입니다. 먼저 진보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기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 보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자본주의는 진보이나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보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는 퇴조 내지 용도 폐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의 공산주의는 수구 꼴통입니다. 그 수구 꼴통인 가치가 우스꽝스럽게도 지금 남한에서는 진보가 되고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좌는 뭐고 우는 무엇일까요. 진보 보수가 상대적인 개념인데 비해 좌우는 절대적인 개념입니다. 성장을 우선하면 우파고, 분배를 우선하면 좌파입니다.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면 우파고,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면 좌파입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4대 요소가 있습니다. ①법치주의의 확립, ②자유경쟁의 실현, ③기회균등의 보장, ④취약계층의 보호가 그것입니다. 국정의 우선순위가 이 순서대로이면 우파고 그 반대면 좌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인 개념인 보수 진보와 절대적인 개념인 좌우를 혼동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흔히 좌는 진보고 우는 보수로 잘못 인식됩니다. 중국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그리고 더 잘못된 것은 '개혁'과 '진보'를 혼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언론이 그렇습니다. ‘개혁 대 보수’라는 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습니다. 개혁은 틀 자체는 유지하면서 문제점에 대한 개선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혁’과 대비되는 개념은 ‘현상유지’ 또는 ‘혁명’입니다. 현상유지는 말 그대로 개선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혁명은 개선보다는 틀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이 없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고, 혁명을 지향하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급진입니다. 즉 보수와 진보는 방향성이 다를 뿐 모두 개혁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개혁 대 보수’와 같은 잘못된 용어를 계속 쓰다보면, 보수는 반개혁이 되어버려 개혁의 이미지를 몽땅 진보진영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보수라는 개념이 마치 수구처럼 온통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좌파세력에 비판적이라는 신문들 그리고 심지어는 한나라당 사람들도 아무 생각없이 개혁대 보수라는 말을 씁니다.

#5. 그런데 더 더욱 잘못된 일은 친북과 반북이 좌우, 보수 진보의 개념에 끼어들어 혼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친북은 진보고 좌파로 분류됩니다. 반대로 반북은 보수고 우파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게 있습니다. 친북 반북 할 때의 ‘북’은 북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주민의 생존권과 인권을 유린하는, 절대왕조를 능가하는, 시대착오적인 부자세습 독재정권을 두둔하면 진보 좌파로서 개혁이 되고, 비난하면 보수 우파로서 반개혁이 됩니다. 얼마 전에 북한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썼더니 나를 좋아하는 어느 후배가 ‘나는 형이 개혁적인 줄 알았더니 되게 보수네’ 라고 해 어안이 벙벙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진보나 좌파나 친북이라 해서 개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보수나 우파나 반북이라 해서 반개혁도 아닙니다. 개혁은 말 그대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에도 다소 좌파적이고 친북한정권적인 성향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당내에서 누가 봐도 잘못된 일에 대해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옹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개혁이 아니고 반개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과격노조가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주범이라는 비판이 옳다면, 그 과격노조를 바로 잡는게 개혁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과격노조가 진보좌파 친북이라해서 개혁세력이라 합니다. 한편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 자신은 잘못되어도 좋다는 개혁은 결코 개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개혁은 세상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잘못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은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치는 ‘이름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정치가 몹시 어지러운데, 이름 즉 개념들이 너무 어지럽습니다.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름부터 바로잡을 일입니다.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장

국회의원 정두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