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야릇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바로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단지 책을 읽어주는 것을 그렸다면 별다른 감흥이 없겠지만 그것이 묘하게 어느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된다면 어떨까?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혹은 겁에 질린 사람들을 진정시키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숨겨진 열망을 끌어내거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라면 어떨까? 소름이 돋는다.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그런 힘이 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도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독일의 작은 도시에 살던 리젤의 삶은 처참했다. 이념과 전쟁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그녀는 남의 집에 맡겨진다. 다행히 그녀는 글을 읽고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족을 잃은 상처를 점점 치유해가지만 전쟁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폭격과 유대인 말살 정책 등은 어린 그녀가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연히 얻게 된, 정확히 말하면 훔쳤다고 할 수 있는 '책'으로 그 시절을 견딘다. 그녀는 그 후에도 책을 훔친다. 책 제목 따라 '책도둑'이 된 셈이다.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을 단련시키는, 그리고 위로하는 것이 된다. 가슴 깊이 헤쳐진 상처를 치유하는 빨간약인 셈이다. 그녀는 책을 혼자만 읽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폭격 때문에 사람들이 지하실로 대피했을 때였다. 겁먹은 사람들이 모여 정신없는 그곳에서 리젤은 책을 읽는다.
"리젤은 위로를 얻으려고, 지하실의 소란을 차단하려고, 책 한 권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제일 위에 있던 것이 '휘파람을 부는 사람'이었다. (...) 그러자 혼잡한 지하실에서 곧 고요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3페이지로 넘어갔을 때 리젤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리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이 자신에게 매달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리젤은 단어들을 잡아당겼다가 숨으로 뱉어냈다. 목소리 하나가 그녀 안에서 음들을 연주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것이 네 아코디언이야." - <책도둑> 중에서
책을 읽는 소녀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히틀러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 장면을 보고, 그리고 상상하면서 소름이 돋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도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 호세 노인은 홀로 아마존 오두막집에 산다. 유일한 취미는 연애소설 읽는 것이다. 그런 노인을 집 밖으로 나서게 만든 것은 어리석은 백인이다. 백인은 정글의 살쾡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마을은 공격받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팀을 이뤄 정글로 들어간다. 호세 노인도 그것에 합류한 것이다.
살쾡이가 뭐 그리 대수인가 싶겠지만, 소설에서 그 살쾡이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나친 탐욕을 응징하는 상징이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기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호세 노인도 그랬다. 그러던 호세 노인이 어느 밤, 책을 꺼냈다.
"글을 알고 보는 거요?"
"뭐 조금 알지."
"무슨 책이죠?"
"소설이야. 그건 그렇고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군. 자네가 말을 하니까 불꽃이 흔들려서 글자가 자꾸 빗나가잖아."
"어떤 이야기죠?"
"사랑 얘기야."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 돈 많고 몸이 달은 여자들 얘기겠죠, 안 그래요?"
순간, 노인이 책을 덮었다. 그 바람에 잠시 가스등의 불꽃이 흔들렸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이건 사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일세. 알겠나?"
한동안 침을 뱉으며 칼날을 가는 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크게 읽으면 안 될까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정말 관심이 있소?" (...)
"좋아, 그렇다면 처음부터 읽어주지. 자네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
"에이, 영감님도. 조금만 더 천천히 읽을 수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잠자리에 든 두 사람까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연애소설 읽는 노인> 중에서
노인이 책을 읽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긴장된 시간이 지배하던 그 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던 것이 노인의 ‘읽어주기’였다. 소설을 읽다보면 책을 읽어주는 것이 만들어내는 어느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대조되는 책 제목이 인상적인 <책 읽어주는 여자>와 <책 읽어주는 남자>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그 힘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의 주인공 마리 꽁스땅스는 34살의 나이로 백수다. 그녀는 괜찮다고 생각하던 목소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기로 하는데 그것은 책을 읽어주는 일이다.
어찌 보면 황당한 것 같지만,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녀의 책 읽어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그녀의 행위는 노동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녀의 읽어주기를 듣던 사람들이 변한다. 또래에 비해 연약해 어머니의 과도한 보호를 받는 아이가 사랑의 속삭임을 알게 된다. 집에만 있던 아이는 집 밖에 나가 모험을 하고 완고한 장군 부인이 데모에 나가기도 한다. 그녀의 책 읽기가 듣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던 어느 열망 같은 것을 선동한 것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이 책을 읽어주는 이유는 다르다. 열 다섯 살의 소년은 어느 연상의 여인 한나와 사랑을 나눈다. 그 와중에 여인은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참 뜻밖의 주문이었지만 소년은 그녀의 요청대로 책을 읽어준다.
돌연 그녀가 사라진 후에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느 진실을 알게 된다. 한나가 글을 몰랐다는 것이다. 한나는 법정에서 남의 죄까지 뒤집어 쓴 채 모욕을 당하고 벌을 받는다. 한나가 감옥에 간 것을 알게 된, 이제는 어른이 된 소년은 다시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한다.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는 방법으로 읽어주는 것이다.
감옥에서 테이프를 듣는 한나의 심정은 어떨까?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그 모든 것이 된다. 따뜻하게 아픈 마음을 치유해준다. 한나가 겪어야 했던 그 숱한 치욕은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위로받고도 남는다. 책을 읽어주는 건 그런 힘이 있는 게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일반적인 행위 같아 보인다. 그런데도 소설들은 왜 이리 아름답다 못해 소름끼칠 정도로 황홀하게 묘사한 걸까? 그것을 문자로 설명하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직접 느껴볼 수 밖에 없다. 책을 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읽어주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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