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이재정 변호사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기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얼굴 공개와 관련한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찬반 논쟁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언론이 드디어 한 건 했다.
기대와 우려를 저버리지 않는 화려한 제목과 함께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군포살인범의 얼굴이 공개됐다. '부녀자 7명의 미소를 앗아간 살인미소'. 부제 또한 기막히다.
꽃미남 스타의 대표적 수식어인 '살인미소'라는 칭호를 '진짜 살인자'에게 부여하는 센스를 발휘했으니 '네이밍' 감각 또한 참으로 높이살 만하다. 지문을 없애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등의 엽기적인 살해 방법이 범죄백서인양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사건을 접한 필자의 감정 역시, 이 글을 읽고 있을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 법률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느꼈던 공포와 분노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피의자 얼굴에 씌워진 마스크를 벗겨내고 가증스러운 살인마의 얼굴을 향해 돌팔매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충동은, 십수 년 꼿꼿하게 지켜온 내 법률가적 소신을 꺾으려 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오고 있는 나의 법적 소신, 그 이성의 끝에 무심히 물음표를 붙여본다.
국민의 법 감정? 지금의 내 느낌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우리들의 공통된 그것을 마냥 감정적이라 몰아세우지 않고 그 공통의 보편적 정서를 존중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감히 '법 감정'이라 명명한다.
법 감정이라 함은 '법적 판단과 그 결과에 대한 감정'을 말한다. 법적 판단의 경로와 그 결과에 대한 인지를 전제로 그 정서를 말하는 것이지 범죄인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분노 그대로를 '법 감정'이라 하지는 않는다. 사법기관이 아닌 우리는 직접 범죄자에게 돌팔매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합의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이러한 소박한 합의를 전제로, 국민 법 감정을 좇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써, 우리 모두가 동의한 최소한의 규율인 헌법으로부터의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인권,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베푸는 은전 아닌 '최소한의 마지노선' 사회적 합의라는 큰 틀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우리 헌법은 헌법 제27조 제4항을 통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으며 헌법 제10조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한 가치로서의 인격권의 일환으로 초상권을 보호하고 있다.
이는 기본권이다.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이 다른 기본권과 충돌하거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권의 제한은 "법률"이라는 방법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며 그 제한에 있어서도 그 권리의 본질적 부분까지 제한할 수는 없다.(헌법 제37조) 법률에 의하여서만, 그리고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의 정당한 목적이 있을 때에만, 그 본질적인 내용을 제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다시 말해 기본권을 법률이라는 방법으로 합의한 원칙 내에서 그 본질적 내용만큼은 침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제한하자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은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베푸는 은전이 아니다.
이는 시혜적이거나 국가가 만들어주는 형성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최소한의 마지노선으로 누구나 누려야 하는 천부적 권리인 것이다. 흉폭하고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무조건 용서하거나 시혜를 베풀자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천부인권은 국민의 기본권의 범주에서 보호 받아야 할 최소한의 영역이므로 그 마지노선만은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원칙에 동의한다면 거시적인 원칙에 따라 조금 더 깊이 따져보자. 과연 피의자의 초상 등의 신상공개가 어떠한 정당한 공공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지, 그 제한은 적절한 방법으로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지를 곰곰 살펴보아야 한다.
신상공개로 얻을 실익 거의 없어... 그의 아이들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먼저, 신상을 공개하자는 주장의 근거, 즉 헌법상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 살펴보자.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권이 충돌하는 경우 헌법재판소는 피해자가 공적 인물인지 사인인지, 그 표현이 공적인 사안인지 순수한 사적인 영역인지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를 공인이론이라고 하는데,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이 주체가 된 사건의 보도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피의자의 경우처럼 당해 행위에 의하여, 즉 본인이 범죄를 저지른 것만으로 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후자, 공적인 사안이라고 판단하여 알 권리를 인정한다고 한다면 피의자의 초상권 등이 알 권리의 대상이 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 권리의 기본적 성격은 인격형성과 자기실현을 도모하는 개인적 권리인 동시에 정치적 의사형성과정에서 자기통치를 실현하는 공공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알 권리의 내용과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사건과 같은 유형의 범죄를 접하면서 국민이 알아야 하는 알 권리의 대상은 범죄의 양태와 그 경위 등이지, 피의자의 얼굴이 아니다.
또한 당해 범죄자의 재범방지라는 목적은 중대범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형벌의 정도에 비추어 실효성이 없으며 동종유사 강력범죄에 대한 방지라는 명분 역시 과연 신상공개로 그 일반 예방적 효과를 도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구체적 범죄사실이나 범행동기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범인의 결혼 경력이 가십거리처럼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행태는 차치하고라도, 범죄사실과 연관 없는 16살, 14살, 8살 된 그의 자식들과 관련하여 확대 재생산되는 기사더미 속에 암매장되어 가고 있는 그 어린 소년들의 인권은 무엇으로 보장되고 보호 받아야 옳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무기징역 이상의 형이 확실시되는 상태에서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과연 어떤 실익이 있을지 의문이며 오히려 그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줄 뿐이다.
'살인미소'와 '연쇄살인' 이어붙인 언론 고맙지 않다최근 몇몇 언론들이 앞 다투어 경기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피의자의 외모적 특징과 범행을 대비시키는 웃지 못할 선정적 보도행태를 보이는 것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의 알 권리를 이토록 친절히 실현해 주시는 언론에 대해 마냥 고맙게만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저녁시간, 범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전율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솜털을 곤두세우는 잔인한 범죄수법에 치를 떨며 "차라리 '모를' 권리 제정을 위해 가두로 나서고 싶다"는 어느 지인의 우스갯소리가 왠지 무겁게 들린다. 친일파 명단과 비리정치인의 재산내역 공개에는 한없이 인색한 언론이 '쳐죽일' 파렴치범의 얼굴 공개에는 왜 그리 적극적인지 모르겠다는 농도 왠지 씁쓸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를 '광화문 네거리에 매달고 돌팔매질을 하는 일'은 백성들의 몫으로 남겨 두자.
언론의 역할은 여론을 '선도'하는 데 있지, 여론을 '선동'하는 데 있지 않다. 언론이 여론을 그리 몰아감으로써, 무죄추정의 원칙은 범인의 살인미소에 묻히고, 경찰관 직무규칙의 초상권 보호 의무는 악마의 영혼 밑에서 숨죽인다.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면 범죄 예방 효과가 클 것이란 논리를 억지로라도 믿고 싶다. 아니,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범인의 얼굴을 공개한 그 어떤 나라에서도 범죄율이 낮아졌다는 통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언론은 피의자의 얼굴이나 이름과 같은 신원공개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피의자의 인신구속으로 수사와 재판절차가 진행되고 그 후 재판절차 내에서 무죄로 밝혀진 경우 당사자는 형사피해보상청구권의 일환으로 국가를 상대로 금전적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인신구속으로 인한 피해도 사후 금전배상으로 온전히 회복되기 힘든 것이기에 우리는 수사와 재판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엄격한 요건 하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 신중하게 집행한다.
이에 비하여 오늘날과 같이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 피의자의 얼굴 등 기본적 신상이 공개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며 사후 무죄임이 밝혀지더라도 쉽사리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또한 그 피해는 피의자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피의자의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더더욱 심각하다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범죄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다녀야 하나?
결국 피의자의 기본권 침해 정도와 그에 따른 피해는 매우 큰 반면 보호되는 공익은 그 실체를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인면수심의 범죄에 대한 여론의 감정에 보다 초점이 맞춰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법률에 의하여 정해진 절차 내에서 3심에 걸친 사법기관의 판단을 통해 비로소 범죄에 대한 유죄를 판단하고 법률이 정한 바에 따른 형벌을 집행하는 제도적 절차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두고 있는 이상 유죄의 판결을 받기까지는 그 어떤 누구라도 무죄 추정원칙의 범위 내에서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상공개는 수사상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권적 형사법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지금의 인권이다.
현시점에서 범인의 얼굴 공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재위장혐의 등 여타의 사건들에서 강모씨가 어떻게 수사망을 유유히 빠져 나갈 수 있었는지, 실종자에 대한 신원파악과 수색 등 초동수사에는 허점이 없었는지 대한 점검과 대책 마련이다
모든 국민들이 중대범죄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감시하면서 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 국민의 안녕과 안전은 1차적으로 경찰 등 국가기관의 의무이자 몫이다.
국민들이 진정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섬뜩한 범인의 얼굴이 아니라 안전하게 귀가하여 가족의 품에서 환하게 웃는 딸아이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