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하느님께 감사하며 옆자리에 앉으신 한 분 수녀님께 부탁하여 우리 네 식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태안에서 서울까지 달려와 우리 가족이 함께 시국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여기며, 다 함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옆자리에 앉으신 한 분 수녀님께 부탁하여 우리 네 식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태안에서 서울까지 달려와 우리 가족이 함께 시국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여기며, 다 함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 지요하

2일 '주님봉헌축일' 아침에 우리 성당에서 여섯 명의 용산참사 영혼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한 우리 가족은 하느님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오후에는 서울엘 갔다. 동작구 상도3동 처형 집 앞에 차를 놓고, 우리 가족은 6시쯤 택시와 전철을 이용하여 청계광장으로 갔다.

시청 역에서 내려 출구를 찾는 일부터 딸아이가 길 안내를 맡았다. 딸아이는 서울에서 3년을 살아서 서울 지리에 비교적 훤한 편이었다. 지상으로 나와서 청계광장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대뜸 경이로운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대한 경찰 버스 대열이었다. 아들 녀석은 처음엔 경찰 버스들인 줄을 모른 나머지 "버스들이 왜 저렇게 많이 줄지어 서 있지?"라고 의문을 표해서 누나로부터 "그것도 모르냐? 직감이라는 게 있어야지"라는 핀잔을 들었다.

내 아들도 저들처럼 될 수 있다 생각하니...

나는 일순 두 다리가 뻣뻣해지고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지난해 농양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아직도 오금 부위에 뻐근한 불편함이 남아 있는 오른쪽 다리뿐만이 아니라 두 다리가 다 불편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처지는 나를 돌아보며 아내가 "왜 그래요? 불편해서 그래요?"하며 걱정스러운 소리로 물었다. "완전히 경찰국가로구먼. 1970년대로 되돌아온 느낌이야. 2009년의 경찰국가 풍경을 보자니 더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나는 비통한 소리로 웅얼거렸고, 계속 뒤처진 채로 걸었다.

버스에서 내린 일단의 전경부대가 헬멧을 쓴 채로 열을 지어 어디인가로 빠르게 이동했다. 나는 괜한 공포감을 삼키며 앞서가는 내 아들 녀석을 바라보았다. 올해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생활할 녀석이었다. 가까운 장래에는 병역의무도 필해야 할 신세였다. 아비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회적 고민의 표피를 키워 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군에 입대하면 전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전경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내 자식 같은 저 전경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지네. 미구에 저런 신세가 될지도 모를 내 아들녀석도 지레 가엾어지고…."

앞서가던 발을 멈추고 나를 기다려주는 아내에게 나는 또 한번 한숨 섞인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안되죠.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과 희망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길 온 거구요"하며 아내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미사 준비 우리 가족은 비교적 일찍 온 덕에 제대 가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들녀석은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고, 모녀는 유인물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미사 준비우리 가족은 비교적 일찍 온 덕에 제대 가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들녀석은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고, 모녀는 유인물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 지요하

이윽고 우리는 청계광장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형 트럭의 적재함을 개조해서 설치한 제대 쪽으로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깔개를 준비해오지 않아서 네 개의 방석을 구입하느라 4천원을 지출했다. 미사 준비 상황을 보고 계시는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님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의 시국미사와 관련하여 서울대교구 사제인사에서 해당이 안 되는 '안식년' 발령으로 쫓김을 당한 분이었다. 지난해 10월 25일 충남 논산시 상월면 '오체투지 순례' 현장에서 처음 뵌 이후 100일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뵙는 반가움이 컸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들녀석이 건네주는 촛불을 받아들고 한동안 일회용 컵 안의 촛불에 하염없이 눈을 주었다. 의미심장하고 사랑스러운 사물이었다. 빛과 열과 형체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지속적으로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체이기도 했다. 오늘은 주님봉헌축일이 아닌가. 내 삶을 하느님께 잘 봉헌하며 살기를 다짐하는 날이 아니던가.

내 손에 들린 촛불은 내 눈에 여러 가지 형상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내 온몸과 가슴에 따뜻함과 뜨거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촛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물이었다. 자신을 태우고 녹여서 빛을 밝히는, 그 장엄한 이치와 메시지의 실체였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내 믿음도 소망도 가능하며 잘 유지될 수 있을 터였다. 

지난해는 병상생활을 하느라 한 번도 손에 쥐어보지 못한 촛불이었다. 지난해 손에 쥐어보기를 뜨겁게 갈망하면서도 내 손으로 작은 촛불 하나 보태지 못한 것을 되우 죄스러워 했기에, 오늘 비로소 손에 쥐어보는 촛불이 나로서는 너무도 소중하고 정답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촛불을 든 신부님들 100분도 넘는 신부님들을 보며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다. 촛불을 들고 있는 신부님들의 모습은 그대로 예수님을 안고 있는 형상으로 내게 보였다.
촛불을 든 신부님들100분도 넘는 신부님들을 보며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다. 촛불을 들고 있는 신부님들의 모습은 그대로 예수님을 안고 있는 형상으로 내게 보였다. ⓒ 지요하

신춘문예로 맺은 동아일보의 연을 끊기까지

나는 문득 눈을 들어 제대 너머에, 자못 위압적인 형태로 서 있는 동아일보 사옥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서 있는 실로 걸판진 모습이었다. 서남쪽으로 대각선상에 서 있는 조선일보 사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먹이경쟁을 하면서도, 거짓과 왜곡과 혹세무민의 영역이 날로 축소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경쟁적으로 그 입지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깨동무를 한 채로 안간힘을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허위 큰 모습은 더럭 안쓰럽고도 측은한 본새다.  

나는 또 문득 청년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저 신문사들의 신춘문예를 잡기 위해 얼마나 열병을 치르며 통한의 눈물을 쏟았던가. 원고 마감날 지방에서 부랴부랴 올라와서 원고를 접수시킨 때도 있었고, 마감이 며칠 지난 뒤에 찾아가서 통사정을 한 적도 있었지.

그러다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간신히 잡았다. 전두환 군사정권 초기, 참으로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추상적'으로 다루면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상징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중편소설이었다. 심사위원(최인훈/유종호)들이 고민을 많이 했노라고 했다. 오래 고심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소설을 뽑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와서 결정을 했노라고 했다. 그리고 지면 발표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신문사에 위임했다고 했지.

그래서 동아일보사는 나를 불러올렸고, 편집국장과 문화부장이 나를 가운데 끼고 앉아서 뼈와 살의 일부를 발라내는 일을 했지. 여기저기에서 몇 줄씩 걷어내고, 한 부분은 통째로 20여매 분량을 도려내기도 했지. 그래서 내 등단작품 <추상의 늪은>은 315매 소설이 290매로 축소되고 상처를 많이 입은 상태로 <신동아>에 발표되었지.

그래도 나는 동아일보를 사랑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라는 자부심도 적당히 챙기며, 동아일보의 애독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는 두 차례나 '격려광고' 대열에 실명으로 참여했고,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에 굴복한 이후에도 지역에서 동아일보 구독자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동아일보 지면에 소설가 이외수씨 다음에 크게 소개된 적도 있고, 문화면 고정 칼럼인 '청론탁설'을 한 주에 한 번씩 두 달 동안 집필한 적도 있고, 동아일보를 아끼고 돕는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안동교구 신부님의 강론 안동교구 김영식 신부님의 강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포효와 같은 음조였다. 비탄과 절규와 분노가 조화를 이루는 그 음조 속에는 2천 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외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듯했다.
안동교구 신부님의 강론안동교구 김영식 신부님의 강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포효와 같은 음조였다. 비탄과 절규와 분노가 조화를 이루는 그 음조 속에는 2천 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외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듯했다. ⓒ 지요하

그러다가 나는 2001년 모든 희망을 접었다. 조선일보를 따라가는 어중이 짓에 실망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대 때부터 30년 가까이 보아오던 동아일보 구독을 과감히 끊었다. 그러고는 발을 끊고 지내는데, 해마다 연초에 초청장을 보내오는 신춘문예 시상식이며 동아일보 출신 문인들의 친목 모임 등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2009년 2월 2일 저녁 청계천광장,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함께 '용산참극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국미사'를 지내는 자리에 앉아 트럭 적재함 제대 너머에서 자못 거창한 몸체로 위용(?)을 자랑하는 동아일보 사옥을 보자니 자연 지난 시절의 일들이며 갖가지 쓰린 감회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미사는 청주교구 김인국 신부님의 사회로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시작되었다. 광장 한켠  간이 천막 안에서 제의를 입으신 신부님들이 두 줄로 행렬을 지어 제대 좌우로 입장했다. 신부님들은 100분이 넘어 보였다. 외국인 신부님들도 여러 분이었다. 신부님들의 긴 행렬을 접하자니 울컥 고마운 느낌으로 가슴이 끓어올랐다. 이렇게 많은 신부님들이 참여하시다니! 참으로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고, 일순 눈물이 솟아올랐다.

트럭 적재함의 제대 주위로 오르신 몇 분의 신부님들도, 트럭 아래 제대 좌우에 자리잡으신 신부님들도 모두 서신 채로 미사를 지냈다. 미사 주례는 서울대교구 전종훈 신부님이 하셨고, 강론은 안동교구 김영식 신부님이 해주셨다. 김 신부님의 강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음조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절규와 비탄과 포효 속에는 눈물도 있었다. 수많은 전등불빛들을 안고 자못 휘황하게 빛나는(한편으로는 음울함이 감도는) 성채와도 같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을 향한 분노의 질타 속에는 '정론직필'에 대한 뜨거운 희원이 눈물처럼 어려 있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를 강요하는 슬픈 현실

1974년에 탄생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어언 35년의 연륜을 안게 되었다. 유신독재가 한창이던 1974년, 팔팔한 26세 청년이었던 나는 지난해 회갑을 넘기고 노년의 문턱에 들어서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내게 늘 희망이며 위안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의구현사제단과 30여년을 함께 살아온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운동사에 정의구현사제단의 비중은 참으로 크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야 언제 어디서나 늘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 정의구현사제단의 존재 가치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게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아이러니는 늘 진실을 내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이비 추종자들, 반대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참 구세주의 면모를, 구세사의 진면목을 이룰 수 있었다.              

영성체 장면을 바라보시는 스님들 천주교 사제단 뒤에 서서 사제단과 함께 입장하시는 불교 스님들을 보며, 그 모습에서도 큰 감격을 맛보았다. 스님들이 제대 앞 신부님들의 영성체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영성체 장면을 바라보시는 스님들천주교 사제단 뒤에 서서 사제단과 함께 입장하시는 불교 스님들을 보며, 그 모습에서도 큰 감격을 맛보았다. 스님들이 제대 앞 신부님들의 영성체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 지요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가 또다시 올려지는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암울하다. 오늘의 현실이 정의구현사제단이 탄생하던 1970년대를 상기시킨다는(비슷하다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의 일치된 견해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수십 년의 피눈물과 노력 끝에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민주화의 과실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민주화의 과실을 오히려 민주화 운동을 훼방해온 세력들에게 갈취 당한 형국이다. 그런 상황은 오늘 또다시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를 강요한다. 역시 아이러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매우 허약하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선거 제도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도 있다. 거짓과 불의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고,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온갖 가장과 기만으로 독재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런 현상 때문에 정의구현사제단은 계속 존재하며, 오늘도 빛과 진리이신 하느님께 지혜와 힘을 청한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용산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관 한 분의 이름을 되뇌며, 그들이 처했던 극한 상황과 그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된 그간의 전후좌우 사정들을 떠올려보곤 했다. 곧 대학생이 될 아들녀석의 손을 잡고 모두와 함께 '주님의 기도'를 할 때는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민주화 투쟁 시절에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간절히 염원했다. '상식'이라는 단어도 많이들 입에 올렸다. 그 상식이 다시금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상식은 큰 지혜, 높은 정신의 가장 초보적인 밑바탕이다. 그것이 까뭉개지는 현실에서는 타락한 가치관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는 다시금 상식을 찾아 나서야 한다. 또 그것을 위해서는 진리이신 하느님, 빛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과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줄기차게 매달리며 나아가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천주교 신자로서 좀더 뜨겁고 바른 자세로 살고자, 그 첫걸음으로 2월 2일 주님봉헌축일 저녁에 가족과 함께 청계천광장,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기꺼이, 뜨거운 의무감을 안고 참례했다.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앞으로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계속 참례할 생각이다. 내가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므로….


#용산참사#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시국미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