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무개(43·서울 서대문)씨는 3년 전 폭스바겐 파사트를 구입해 소유하고 있다. 한 두푼 주고 산 차가 아닌 만큼 차에 대한 신씨의 애정은 각별하다. 차에 흠집이라도 날까봐, 절대 기계세차장 근처는 가지도 않고, 손세차만 고집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폭스바겐 차가 좋다고 홍보까지 할 만큼 자신의 차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최근 신씨는 아내와 함께 차를 운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험도 부부한정 특약으로 고쳐서 가입했다. 지난 2일 신씨는 아내에게 여분의 열쇠를 주기 위해 3년 전 차를 구입할 때 서랍에 넣어두고,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보조 열쇠를 찾았다.
그런데 보조 열쇠에 달려있던 꼬리표에 'Passat 전시'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신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3년 전 차를 구입했던 클라세오토(폭스바겐 전문 딜러) 역삼동 지점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이 차가 전시차였느냐?"고 물었더니, 클라세오토측에서는 "일주일간 대전에서 전시되었던 전시차가 맞다"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3년 간 애지중지 했던 내 차가 전시차였다니..."
신씨는 3년 전 차를 구입할 당시의 기억을 꼼꼼히 더듬어봤지만 판매사원으로부터 전시차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 판매사원이 "전시차라도 괜찮으시겠냐"고 해서, "싫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 반드시 새차를 달라"고 분명히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를 인수받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클라세오토측에서는 차를 인수받기까지 2개월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나 계약한 지 일주일 만에 차를 가져가라는 연락이 온 것. 신씨가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고 묻자, 판매사원은 "고객님께서 VIP로 등록이 돼 있어서 다른 고객보다 최우선으로 배정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있다. 신씨가 차를 가지러 가겠다고 하자, 판매사원이 먼저 "차에 광택을 하지 않겠느냐, 비용은 15만원이고, 선팅은 서비스로 해드리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신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동의해줬고, 그 날 오후 차를 가지러 클라세오토 압구정동 서비스센터로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신씨는 금세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문 안쪽에 20센티미터 길이의 흠집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묻자, 판매사원은 "광택을 내면서 그렇게 됐다"고 연신 사과했다. 판매사원의 쩔쩔매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차를 몰고 왔지만, 불쾌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신씨는 라이트 온오프 스위치 도색이 벗겨져 있는 것을 추가로 발견했다.
신씨는 "차 내부 흠집 등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차를 인도 받을 당시 전시차라는 어떤 언급도 없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며 "3년 동안 애지중지 몰았던 차가 (구입하기 이전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던 전시차였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신씨를 더 황당하게 만든 것은 클라세오토측의 대응이었다. 신씨가 전시차임을 고지하지 않고 판매한 것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자, 클라세오토측은 "전시가 7일밖에 안되서 거의 새차와 같으니, 괜찮지 않겠느냐"며 기름을 채워주고 2차례 정도 엔진오일과 필터 등을 교체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
신씨는 "구멍가게도 아니고 큰 회사가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처리한다는 프로세스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처음에는 보상을 받으려고 했지만, 주유 만땅 넣어주고, 필터 좀 갈아준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제는 보상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씨의 아내도 "만일 전시차라고 했다면 우리가 차를 샀겠느냐"며 "일반 사람들이 전시차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앞으로는 차를 살 때는 '전시차로 드러날 경우 몇 십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을 계약서에 써서 공증을 받아야겠다"고 분개했다. 억울한 마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신씨의 아내는 6일 클라세오토 역삼동 지점 앞에서 전시차를 새차로 속여서 판매한 것을 규탄하는 1인 시위를 할 예정이다.
"알면서 그랬으면 사기 판매지만... 기억 안 난다"하지만 클라세오토측은 더 이상의 보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신씨가 차를 구입할 당시 역삼동 지점장이었던 이아무개씨는 "차를 넘겨드릴 때 전시차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면 고객들이 얘기하는 '사기 판매'가 되겠지만, 시간이 오래 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이미 3년이 지났지만, 도의적으로 안타깝고 죄송하다"며 "그러나 (회사 차원에서) 보상 방안에 대한 별도의 프로세스가 없다. 제시한 보상 조건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의 판단은 다르다. 3년 전에 구입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시효 기간을 정해놓은 게 아니기 때문에 당시 전시차와 신차 구입 가격 차이에 맞춰서 배상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국산차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전시차와 신차의 가격이 30~50만원 정도 차이가 나거나, 전시차를 구입할 경우 신차 가격의 2~3% 정도를 할인해 준다. 따라서 가격이 비싼 수입차의 경우는 배상 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특히 전시차임을 고지하고 판매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고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동차 관련 법을 위반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민법에서는 소비자에게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신차와 전시차의 가치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지 의무가 있는 셈이다.
김병법 소비자원 피해구제본부 차장은 "법적으로 논하기는 그렇지만 당연히 물건의 가치를 봤을 때 신차와 전시차는 차이가 난다"며 "프로인 (자동차) 딜러는 아마추어인 소비자에게 가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안 알려줬다면 소비자에 대한 기만"이라고 지적했다.
김 차장은 이어 "요즘엔 국내차도 조심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고급 수입차에서 전시차 미고지 사건이 발생한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라고 말했다. 딜러가 소비자에게 사전에 고지해줘야 할 리스트에 전시차 여부가 포함 돼 있다는 것이다.
전시차 재떨이에 립글로스를 찍어 둔 까닭은?
김 차장 말대로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다른 수입차 업체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M씨는 지난해 7월 한 수입차 매장에서 볼보C30을 구입했다. 그런데 M씨는 지난 1월 우연히그 매장 앞을 지나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차를 구입하기 전 시승했던 전시차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매장에 전화를 걸어서 당시 전시차의 행방을 물었고, 결국 새차라고 생각하며 타고 있던 자신의 차가 그 전시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곧바로 매장에 항의했고, 딜러는 전시차임을 고지하지 않은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판매 당시 할인을 많이 해주지 않았느냐"고 변명했다. 하지만 M씨는 거듭 신차로의 교환을 요구했고, 135만원의 추가 할인을 받고서야 항의를 멈췄다.
최근 다음카페의 '클럽IS'와 중고차 전문사이트에 올라온 ㅂ씨의 피해 사례도 눈에 띈다. 지난해 12월 23일 ㅂ씨는 렉서스 IS250을 사기 위해 서울 이태원의 딜러점을 방문, "전시차가 아닌 새차를 달라"는 당부와 함께 짙은 회색 모델을 계약했다.
닷새 뒤 가족과 함께 차를 구경하기 위해 다시 전시장을 찾은 그는 전시차 뒷좌석의 재떨이 안에 립글로스를 찍어뒀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달 31일 새 차를 인수하러 온 ㅂ씨에게 판매사원이 내놓은 것은 바로 전시차였다. "절대 전시차가 아니"라며 버티던 판매사원은 ㅂ씨가 재털이의 립글로스 자국 등을 제시하며 따지자, 결국 전시차임을 시인했다.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ㅂ씨는 딜러가 배상 조건으로 제시한 약 400만원의 추가할인과 코팅·휴대용멀티미디어방송(DMB) 기기 등을 마다하고, 계약을 파기했다.
전시차에 속지 않는 방법은? |
왜 자동차 딜러들은 전시차를 새차라고 속여서 판매하고 있을까? 결국 수당 때문이다.
딜러들은 차를 판매하기 위해 높은 할인 조건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 할인을 자신이 떠안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나마 전시차의 경우는 회사측으로부터 높은 할인을 받아 낼 수 있다. 결국 고객에게는 전시차임을 속이고 회사측으로부터는 전시 할인을 받아서 그 차액을 자신의 수당으로 챙기는 것이다.
김병법 차장은 소비자들이 전시차 여부를 알려면 차 출고일이 적힌 재작증명서와 수입 시기, 세금계산서 날짜와 구입 시기, 내장재 보호비닐 훼손 여부 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차장은 "딜러들은 전시차라는 것이 나중에 들통이 날 경우 소비자에게 개별적으로 접촉할 때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소비자원에 접수되고 사건이 공식화 되면 사실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며 "그 차가 전시차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나중에 소비자에게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소비자가 개별적으로 딜러에게 항의할 때 녹취나 확인서, 증인 등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원은 지난해 말 국내 자동차 업체를 대상으로 피해신고 다발 업체 랭킹을 조사해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판매대수가 적고, 딜러업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수입차는 당시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수입차의 시장 점유율이 5%를 넘고 있고, 전시차 미고지 등 피해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에 올해부터는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계획이다.
김 차장은 "수입차의 경우 가격은 외국보다 국내에서 더 비싸게 받으면서 서비스는 높은 수준으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수입차에 대해서도 집중 관리를 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