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라고. 어쩌다가 특별기획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2회부터 보게 되었는데 스토리의 빠른 전개 때문에 한 번 보기 시작한 드라마를 끊기도 쉽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다. 이제 몇 부 남지도 않았으니 끝날 때까지 다 보기는 하겠지만 정말 보면서도 고통스러운 드라마다. 이렇게 드라마가 나에게 고통인 적이 있었나. 그런데 나는 왜 이 드라마를 보아야 하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다.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될까. 이 한 가지 호기심 때문에 나는 월,화요일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1. 연출의 막장, 극본의 막장, 연기의 막장막장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막장의 대명사로 통하는 <너는 내 운명> <아내의 유혹>을 보지 않아서 비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에덴의 동쪽>은 정말 막장 드라마 맞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막장 대충 드라마라고 하겠다. 대충 만든 티가 너무 난다.
첫 시작의 배경은 70년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80년대를 거쳐 지금은 90년대 중반까지 와있다. 그런데 80년대에 90년대 중반에 지어진 종로 국세청 빌딩이 나타나고, 90년대에 2007년형 BMW가 등장한다. 어렵게 구한 옛날 버스가 이동하는 길 뒤편으로는 판교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다. 아무리 제작비 절감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배경을 보고 있으면 시대상황과 몰입이 안된다. 광고판에 등장하는 굿모닝신한증권은 외환위기 이후 생겨난 회사가 분명한데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해 왔다. 이런 부실한 장면은 너무 많아서 일일히 나열하기도 힘들다. 이건 옥의 티를 찾는 재미가 아니라 그냥 퓨전사극이다.
시대고증의 문제는 제작비 절감 문제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부분은 극본이다. 정말 유치함과 단순함의 극치를 달린다. 난 지금도 할 수 있다. 다음에 무슨 대사가 나올지 바로 맞힐 수 있다. 별다른 오차도 없다. 토씨만 다를 뿐이다. 마치 80년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배경은 전부 세련됐는데 대사는 그때 그 대본을 '복사 & 붙여넣기' 한 듯하다.
연출의 문제는 어떤가. 이기철은 선이고 신태환은 악이다. 이것을 배경으로 깔고 모든 사건이 꼬인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 중에 이기철을 선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도저히 모르겠다. 이기철이 뭘 그렇게 잘했고 뭐가 그렇게 의로운 것인지. 왜 그 핏줄이 그렇게 대단한 핏줄이어서 재벌집 아들이 모든 것을 내놓고 그 핏줄로 살고싶어하는지. 이것은 분명히 연출의 문제다. 애초부터 두 사람의 대결을 좀더 명확하게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2대로 이어지는 선과 악의 구도가 더 명확해질 것 아닌가. 이기철이란 사람의 선행이나 의로움을 더 확실하게 그렸어야 한다.
연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했다. 젊은 연기자들의 발연기는 나에게 많은 감흥을 주었다. 송승헌의 편당 출연료 7천만원은 뭘 잘했다고 주는 돈일까. 이연희는 <M>에서 말이 없을 때는 참 예뻤는데 입을 열기 시작하니까 사람이 미워지는구나. 무감 연정훈은 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나마 이 드라마를 살리는 사람은 조민기와 유동근 뿐이다. 최근에는 박해진이 그나마 고군분투하고 있다.
2. 땡기는 핏줄에 뒷골 땡긴다이 드라마의 전반부와 중반부, 후반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쓰고 연출한 드라마 같다. 못난이 3형제가 있다면 각각 전,중,후반부를 맡아 집필을 했을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복수의 전초전에 대서사극 같은 냄새를 폴폴 풍기더니 중반부에서는 갑자기 이승철의 '보고싶다'는 노래로 복수극의 분위기를 확 깨면서 주인공 모두가 사랑과 사랑으로 얽히는 사랑만세 드라마로 돌변한다.
삼촌 쳉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작은엄마를 쫓아다니고 연정훈을 사모하던 이다해는 송승헌에겐 꽃뱀이 된다. 복희 아줌마도 사랑을 하고 귀순이도 왕건이를 만나 사랑을 한다. 급기야는 이미숙에게도 짝을 붙여주려했는데 차마 거기까지는 찔렸나보다. 말없이 일 열심히 하던 아저씨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사랑만세 드라마가 되면서 짝을 지어주던 드라마는 후반부에 핏줄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등록 외국인 100만명 시대, 다문화사회가 된 대한민국에 나타난 21세기 신복고풍인가. 너도나도 핏줄이 땡긴다. 양춘희도 땡기고 나현희도 땡기고 신태환도 땡기고 이동철도 신명훈도 이동욱도 슬슬 땡긴다. 그러더니 국영란까지도 국대화에게 물어본다. "나 아빠 핏줄 맞아?" 열심히 욕하며 보고 있는 나는 정말 뒷골 땡긴다.
뒷골이 땡기다보면 인물들이 여기저기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한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무슨 연극에서 방백하는 것도 아니고 인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예측가능한 타이밍에 그 자리에 등장한다. 무슨 사건이 있으면 뒤에서는 꼭 그 사람이 엿듣고 있다. 연정훈이 이미숙과 함께 형 걱정을 하고 있으면 꼭 뒤에서 송승헌이 몰래 울고 있다. 연정훈이 다쳤어. 이러면 주변 인물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기다렸다는듯이 갑자기 등장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또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참 친절하기도 하다. 이미숙이 신부를 만나 아들 얘기를 물어보려고 하면 갑자기 전미선이 등장해 성님 그러지 마세유 한다. 성당은 강원도에 있는데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어떻게 그리 몰래 따라올 수 있으며 아무리 막장이라지만 드라마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물을 등장시켜도 괜찮은 건가.
이 드라마가 초반 인기를 끌었던 액션 신을 보자. 막장 조짐은 애초에 송승헌이 마카오에서 대충 헛발질 한 번으로 주위의 모든 건달들을 쓰러뜨릴 때부터 나타났지만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송승헌은 밤새 여기저기 쏘다니다가도 싸움질만은 기똥차게 해댔다. 부산 나이트클럽 때문에 거기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가 칼을 맞고 유동근네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기 힘들었을테니 이제 여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이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연정훈이 공부하고 있는 공부방에 갑자기 송승헌이 등장하는게 아닌가. 송승헌이 무슨 홍길동인가. 여기저기 신출귀몰하게.
이 드라마에서 송승헌은 참 연구의 대상이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모든 사람들이 송승헌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학벌도 변변치 않은 한 사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고 서로 스카웃하려고 난리도 아니다. 학벌사회 타파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가? 때마침 이다해는 언론개혁을 주장하며 진보적인 메시지를 심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내 생각인데 이건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극본을 그렇게 쓴 것 뿐이다. 발연기라는 말에 호응하는 발대본이다. 그 다음을 보자. 송승헌은 태성전자를 인수한 이후에도 건달 패거리들을 몰고다니며 회사를 경영한다. 저게 조폭패밀리의 두목이지 무슨 사장인가. 송승헌은 전자 분야에 아무런 전문지식도 없고 경영에 대해서 능력도 검증이 안된 사람이다. 전문가가 아닌 조폭 두목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게 정말 선이란 말인가? 선악 개념은 둘째 치고 회사가 잘 굴러갈 수나 있겠나? 이건 재벌에 대한 또다른 풍자인가? 오 회장이나 신태환 회장, 그리고 신태환의 부인이 태성그룹의 지분을 몇 퍼센트나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주식회사이고 종업원이 수백 명씩 딸린 회사를 자기네들끼리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다. 한지혜는 자기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작정인 모양인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몇 회 전에는 이다해가 중간에 퇴장하고 듣도보도못한 검사장의 딸이 누구 빽인지 모르게 등장하여 연정훈의 짝이 되려 하고 있다. 어리둥절하고 황당하다. 입 아프다. 더 말해서 무엇하리. 드라마라는 것이 작품성이나 시청자 배려는 눈꼽 만큼도 없고 자기들 편한대로만 대충 찍고 보고 싶으면 알아서 보라는 투다.
이 대목에서 난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을 떠올린다. 똑같은 핏줄 타령이고 비슷한 형제 갈등이다. 송승헌도 비주얼로 보면 제임스 딘 만큼 가락이 나온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