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후 조수현에게 본격적인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치보위부 장교의 비행을 수사하라는 것이었다. 평시 같으면 정치보위부 장교를 인민무력부 감찰실에서 수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보위부는 내무성 직할로서 부원이 모두 고급 당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인민무력부의 기무(機務) 기능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개전 후 당에서 첫 번째로 지시한 사항은 남조선 민간인에 대한 민폐 근절이었다. 그런데 정치보위부의 초급장교 하나가 국군 첩자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수사하다가 그의 아내까지 불러 권한 이상의 행동을 했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었다. 조사를 받고 나가던 여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고 그녀의 모시 저고리가 찢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치보위부는 옛 종로경찰서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수현은 저고리를 찢겼다는 여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여인은 서울 주소지에 없었다. 인천 친정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인천지부로 연락해 그녀를 서울로 불러낼 수도 있었지만, 조수현은 자신이 직접 인천으로 가기로 했다. 전쟁 통에 민간인이 서울까지 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수현은 인천지부에 가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의 이름은 강윤애였다. 그녀는 수치스러운지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조수현은 ‘심정은 알지만 이런 일은 국가의 중대사’임을 상기시킨 후,  “진술을 안 하면 당신이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여인은 조그만 소리로 정치보위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그 인민군 장교는 전쟁 전 남한에서 저와 사귀던 사람이에요.”

정치보위부 장교는 해방 후 남한의 현실에 좌절하여 월북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한다는 이유로 종로서에 붙잡혀가 형사에게 모욕을 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조수현은 강윤애에게 상세한 진술서와 서명을 받은 후 물었다.

“처벌을 원하시나요?”

강윤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포기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광장>의 이명준, 그는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다음 날 조수현은 정치보위부 중위 이명준을 소환했다. 그녀는 한눈에 중위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그는 나쁜 인간은 아니겠지만, 조수현의 기질로는 그런 남자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나 대뜸 허황된 말을 내뱉었다.

“우리에게는 광장이 없습니다.”

조수현이 보기에 그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려 하고 입으로만 미와 선을 추구하는 형이었다. 그런 사내들은 대개 아닌 척하면서도 예쁜 여자에게 예민한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여자 앞에서 겉으로는 관심이 없는 양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유형이라고 생각 들었다.

“부친이 남로당 간부 출신 이형도 동무입니까?”

이명준은 조금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현은 조금 날카롭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강윤애와 만난 것은 남조선 댄스파티에서였다구요?”

이명준은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다.

“주위에서 권하기에.... 한 번 가 본 겁니다.”
“누가 권했지요?”

“변영미라는 여학생이...”
“변영미라면 이번 국군 첩자로 체포된 변태식의 동생 맞나요?”

이명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조선에 있을 때 변태식의 집에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신세를 졌다구요?”

“학비와 생활비, 남조선에서 타고 다닌 오토바이 연료비도 그랬을 테고.”
“저는 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월북 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강윤애를 만나러 인천에 갔었나요?”
“네.”

“강윤애가 수박을 접대하고 숙소를 제공했다면서요?”
“네.”

“송도 바닷가에 가서 강윤애에게 바다와 산 중에서 어느 게 더 좋으냐고 질문한 적 있나요?”

이명준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에 없습니다.”
“아무튼 그런 질문을 여자들에게 한 적은 있지요?”

그는 비슬비슬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현이 차갑게 말했다.

“말로 대답하세요. 그런 적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러자 강윤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나요?”
“둘 다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느낌이 어땠지요?”
“........”
“여자가 깡통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명준은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약간 자신 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지요?”

“알다시피 산과 바다가 얼마나 다른 겁니까?”
“똑같은 자연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이명준은 입을 다물고 멍한 표정으로 조수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강윤애가 바다를 보면 어디든지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당신은 ‘유행가를 부르는구나’라는 식으로 조소했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여자를 깔보는 척하면서 내심으로는 여자에게 지나치게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았나요?”
“무슨 말씀입니까?”

“강윤애에게 날 구원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네.”

이명준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지요?”
“........”

“혹시 몸을 달라는 뜻이 아니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강윤애는 그거였다고 하더군요.”
“나는 윤애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조수현은 턱 밑으로 이명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북에 가서 새로 사귄 은혜라는 여자도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고요?”

이명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여자의 옷을 찢고 겁탈하려 했나요? 더구나 그녀의 남편은 간첩죄로 당장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 ”

“예쁜 여자는 모두 소유 아니면 증오의 대상인가요?”
“....아닙니다.”

“물론 아니겠지요. 혹시 변태식을 신문할 때 러시아 말도 섞어 했나요?”
“저는 러시아 말을 잘 모릅니다.”

“‘아첸스파시몬, 이건 땡큐베리마치란 러시아 말이다’라고 했다고 하던데요? 조선 사람이 러시아말을 쓰면 유식해 보이는 건가요?”

이명준은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명준을 보낸 조수현은 그가 여자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관념으로 뭉쳐 있는 지식인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대개 그런 남자일수록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이나 우월감에 젖어 있는 수가 많았다. 그녀는 강윤애가 이명준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참작했다. 그래서 이명준을 일반병과로 전출시킬 정도의 문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상신하고 수사를 종결지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입니다.



#이명준#광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