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일(1.3)
히말라야 발자국 |
08:30 몬조 출발
12:10 남체 바자르(Namche Bazssr. 3440m)
14:10 샹보체(Syangboche. 3750m)
16:00 남체 바자르 롯지
18:00 가이드, 포터와 전통술 창을 마시다. |
히말라야에서의 첫날 밤은 거칠고도 길었다. 고산의 영향인지, 두려움과 긴장 때문인지 잠을 제대로 취할 수가 없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말에 침낭 속에 따뜻한 물이 담긴 수통을 넣고 몸을 뉘였다. 수통의 효과에 대해 기대반 의심반이었는데, 막상 체험한 수통의 난방 효과는 환호성을 지를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심지어 수통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열에 밤 10시경이 되어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나체가 되어 수치의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새벽 5시, 다 식어버린 수통 뒤로 찾아오는 추위에 잠이 깨어 다운파카를 두껍게 껴입고 침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히말라야의 첫 날을 기억 속에서 뒤적거려본다.
6시를 넘어서자 창밖으로 히말라야의 세상이 열리며, 새벽 풍광이 선명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8시에 출발할 계획인데도, 나만 빼고 가이드와 포터는 모두 느리적, 미적거렸다. 여유인가? 게으름인가?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물리적 시간의 잣대를 지워본다. ‘아, 여유로운 사람들이구나!’
몬조를 떠나 남체에 도착하는 길은 꽤 많은 땀과 휴식을 요구하는 길이었다. 한국의 고산을 등반하는 듯 오르막길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왼편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고개 숙여 나를 반기는 두 번째 설산 '꽁데'의 모습이다.
남체로 오르는 고개 중간쯤에서 먼발치로나마 에베레스트를 조망할 수 있었다.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들킬까 두려워 숨죽여 훔쳐본다. 담벼락 너머 사랑하는 처자의 옷깃이라도 보일까 그네를 더 높이 올리는 바람난 총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체에 도착할 즈음에는 무장한 네팔 군인이 마오이스트(공산주의자)를 확인하기 위해 현지인만을 대상으로 검문을 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네팔 사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가 권력화되고 사유화될 때 국민의 고통은 뿌리가 깊어진다.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고 토론과 공론의 장이 마련될 때 건전한 사회를 향한 동력이 일어난다. 하지만 노련한 정치 권력자들이 이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참여 의식의 성장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는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잠들어 있는 아테네를 깨물어 깨우는 쇠파리 역할을 하다가 결국 사형을 맞이한다. 쇠파리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것은 오만한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대화'하고 '비판'하는 법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며 지식층과 권력층에게 대들었던 소크라테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경우를 찾아봅시다.' '아니오'
그의 아버지는 돌을 깨고 다듬어 멋진 석상을 만드는 석공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생명 탄생을 도와 주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석공이었으며, 시민들에게 세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지식과 진리를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산파였다. 성숙한 사회를 위해서는 쇠파리와 석공, 산파들이 있어야 하고, 대화와 비판의 목소리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시끄럽다고 문을 닫을 때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줄 쇠파리들의 성장을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성장의 싹을 자르기 위해 세련된 방법으로 그들을 길들여야 한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론 강압으로, 때론 여론을 조장해 이런 비극적인, 불쾌한 상황의 원인이 당신에게 있음을 각인시켜 주고, 사회는 조금씩 이상을 향해 접근해 가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길들여진다. 이렇게 좋은 사회에서 당신의 빈곤은 당신 탓이다. 당신이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과 고통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참 정의로운 사회가 아닌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들은 지금까지 해 왔듯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그렇게 살아갈지 모른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본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맨맨거리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해 흉포한 악당들을 소탕해 나간다.
악당들을 모두 응징한 후,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악당이 사라진 밝고 행복한 미래를 기대한다. 그들의 부재와 격리를 통해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남은 것은 ‘너’의 책임이다. 또다시 그렇게 길들여진다.
현실은 어떨까? 그들 몇몇을 격리시키면 사회는 건전해질까?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악당을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닐까? 사회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와 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개인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개인적 원인뿐 아니라 사회 제도와 환경이 학생들과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비행과 탈선으로, 범죄자로 만든다. 작은 사회인 학교는 어떨까? 문제를 일으킨 녀석에게 말한다.
‘넌 그래서 안 돼! 이 나쁜 놈아!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뒤돌아 그는 말한다. ‘시X’ 그에게는 어떤 변화도 없다. 오직 ‘시X’이다. 날 이렇게 만든 세상에 ‘시X’,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날 나쁜 놈이라고 하는 세상이 ‘시X’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삶을 모방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기껏해야 15년을 살아왔다.
내가 선택한 것? 없다. 이제 시작이다. 선택을 하려고 하니, ‘나쁜 놈’이라고 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난 진짜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일까? 그렇다면 진짜 ‘시X’이다. 아니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래도 저래도 ‘시X’이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시X’거리며 살아야 할까? 너무 화나고 짜증나지 않나? 진짜 삶이 바닥으로 추락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두 손 불끈 쥐고 일어서자. 나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자. 먼저 내 삶에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떳떳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서자.
상황이 날 지배한다면,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자. 사회의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거짓된 것을 향해 ‘시X’하자. 그리고 바꾸자. 이제부터는 세상을 탓하지 말자. 내가 그 세상을 만들어 갈 테니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날 탓하자. 그런 나를 누구는 ‘노예’라 부를 것이다.
12시 10분. 셰르파의 고향이라 불리는 ‘남체바자르’에 도착하였다. 남체는 쿰부 히말라야의 가장 큰 산간 마을이다. 거대한 설산을 담장으로 급경사인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급경사 꼭대기에 있는 롯지를 잡아 멋진 뷰포인트로 삼으려 했으나, 후배의 고산 증세가 심해져 낮은 롯지를 잡아야 했다. 후배의 건강상 이유도 이유지만, 가이드가 본인이 아는 롯지를 극구 고집하여 못 이기는 척 그 롯지를 선택했다.
롯지 주인의 인상이 그리움 너머 만난 이모처럼 다정다감하다. 얼굴에 그녀의 온화한 품성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후배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방에 올라가야 했다.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고산병의 증세가 심각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쿠시만 남체의 뒷산인 샹보체(3,900m)에 오르기로 하고 롯지를 출발하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봄과 같았다. 샹보체는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고소 적응을 위해 남체에 도착한 다음날 오르는 산이다. 하지만 나는 일정에 대한 지나친 욕심에 떠밀려 일찍 길을 나섰다. 어찌 보면 산을 오르면서 버려야 할 생각이 조급함일 터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더 높이! 더 빨리!
샹보체 정상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롯지가 있었다. 그 옆에서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등 멋진 설산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다. ‘놀라워라!'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특히, 아마다블람 광경은 파노라마의 백미(白眉)였다.
샹보체에서 내려와 보니 후배는 거의 초죽음 상태다. 심한 두통 증세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저녁에 라면을 안주로 전통술인 창을 먹으며 의논한 결과, 후배의 현재 상태로는 일정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나는 나란과 함께 계획된 일정을 추진하고, 쿠시가 남체에 남아 후배의 몸 상태를 보고 일정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가이드 쿠시와 이제야 정이 물들어 가는 중이었는데, 내일 헤어져야 한다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전통술 창을 마시며 늦은 밤(?)까지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였다. 어깨동무하며 찍은 사진이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다.
이제 내일부터 나란과 단 둘이서 트레킹을 나서야 한다. 나란이 영어도 능통하고, 경험이 풍부해 트레킹에 대해선 큰 걱정이 없지만 후배 생각에 근심과 안쓰러움이 떠나질 않는다. 타지의 낯선 시공(時空)에 떨어져 고산병의 고통과 싸우고 있는 후배의 몸부림이 가슴 아프다. ‘괜히 내 욕심 때문에 함께 오자고 한 것이 아닌지?’ 자문한다. 여행에 대한 강한 내적 동기 부여와 함께 절박한 목마름이 있어야 가능한 여행이었다.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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