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코 다친 거 나 때문이야?""아니, 아빠 잘못이지. 놀면서 아빠가 더 주의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네 잘못은 없어.""그렇지. 그럼 확인해 줘.""어떻게?""확인서든지 영수증이든지 써 줘야지."한동안 미안해하던 예슬이의 말문이 터졌습니다. 처음엔 자기 잘못으로 아빠가 다쳤다고 여겼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슬이의 이 같은 생각에는 아이들 엄마의 의견이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아이들 엄마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방치한 아빠의 잘못이라며 핀잔을 몇 차례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예슬이가 엄마의 말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강하게 주장을 합니다. "아빠의 코뼈가 내 발길에 걸려 부러졌지만, 그 발길질을 처음 한 게 아빠였고 또 발길질 하는 것도 아빠한테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은 맞습니다.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제게 똥침을 해대며 재미있어 하던 예슬이의 돌출행동을 막기 위해 발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한 게 바로 저였기 때문입니다. 하여 코뼈가 부러진 건 결국 내 잘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술 더 떠 오마이뉴스 원고료의 절반도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사는이야기'에 올린 '똥침 놓다가 손가락 골절됐다고?'의 소재를 자기가 제공하고 또 사진모델도 됐으니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코뼈 골절의 원인을 뒤집어씌운 것도 부족해서 이젠 원고료까지 달라고 합니다. 제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더니 이내 못 본 척하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아빠! 예슬이가 미워? 예슬이가 원망스러워?""아니.""진짜 아니지? 그럼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당연히 예슬"이라는 답을 유도하고 또 기대하는 질문입니다. 어리광이 가득한 걸 보니 막내는 분명 막내입니다. "넌 아빠 안 좋아하잖아?""아니, 좋아하는데.""얼마 만큼?""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그리고 이 세상 끝까지….""그래? 근데 왜 저번에 아빠 병원에 있을 때 한 번도 안 왔어?""그땐 학교에 가야 했고, 엄마도 안 가도 된다고 해서….""그럼 아빠 토요일에 병원에 갈 건데 같이 가자. 간호사 이모들이 예슬이를 매우 보고 싶어 하던데."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던 예슬이가 안도하며 말을 잇습니다. "저, 토요일에 학교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병원에도 가지 않을 거거든요." 그러면서 "○○병원과 절교하겠다"는 선언도 합니다. "아빠를 때린 딸로 소문이 나서 쪽팔려서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절대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예슬이가 처음부터 병원을 꺼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처음 입원했을 때만 해도 예슬이는 여러 번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또 찾아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며 몇 시간씩 있다가 가곤 했습니다. 심지어 설날엔 점심 때 와서 저녁 늦게까지 병실에 있다가 집에 갔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겨울방학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뼈 골절로 나흘 만에 다시 병원에 들어앉은 뒤로 예슬이의 얼굴을 병원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 개학했다는 게 겉으로 드러난 핑계였지만 예슬이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시쳇말로 '쪽팔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예슬이는 병원 간호사들이 모두 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딸이기에 퇴원한 지 이틀 만에 아빠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또 나흘 만에 입원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궁금증은 간호사들의 말에서 묻어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놀았기에 코뼈가 그 지경이 됐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번져 방금 교대해 들어온 간호사들까지도 한마디씩 하거나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주사를 놓기 위해 온 간호사도 피식 웃기 일쑤였습니다. 그 딸은 왜 안 오느냐고 저한테 물어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쪽팔릴' 걸 걱정하던 예슬이가 방금 잠에 들었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천진하기 그지없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아니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 예슬이한테 이번 일을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집니다. 그 때도 부끄러워할지 아니면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