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정력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온
.. 같은 즈음 호수지방의 철도 진입 반대를 계기로 1883년에 〈호수지방보호협회〉를 만들어 정력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온 하드윅 론슬리도 고민을 안고 있었다 .. 《요코가와 세쯔코/전홍규 옮김-토토로의 숲을 찾다》(이후,2000) 40쪽
“같은 즈음”이라 하고 “동일(同一)한 시기(時期)”라 하지 않으니 반갑습니다. “철도 진입(進入) 반대를 계기(契機)로”는 “철도가 들어서는 일을 반대하면서”나 “철길 놓기를 반대하면서”로 다듬고, ‘활동(活動)’은 ‘일’로 다듬으며, ‘계속(繼續)해’는 ‘이어’로 다듬습니다. “고민(苦悶)을 안고”는 “걱정을 하고”로 손질합니다.
┌ 정력적(精力的) : 기운찬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이 넘치는
│ - 정력적 활동 / 그는 정력적인 웅변가였다
├ 정력(精力)
│ (1) 심신의 활동력
│ - 정력이 왕성하다 / 정력을 집중하다 / 그만한 정력과 돈이 남아 있다면
│ (2) 남자의 성적(性的) 능력
│ - 정력이 뛰어나다
│
├ 정력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온
│→ 힘차게(힘껏) 일을 이어 온
│→ 꾸준하고 기운차게 일해 온
│→ 다부지고(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일해 온
└ …
기운차거나 힘이 넘친다는 ‘정력적’입니다. 그러나 ‘정력’이라는 말을 쓰는 자리를 살피면 으레 ‘정력 (2)’에서 가리키는 “남자의 성적 능력”입니다. ‘-적’을 붙이지 않은 ‘정력’도 “심신의 활동력”으로는 그다지 쓰지 않아요.
말 그대로 힘이 넘치면 “힘이 넘친다”고 하고, 기운차다고 하면 “기운차다”고 할 때가 가장 낫습니다. 비슷한 뜻으로 ‘힘차게’나 ‘힘껏’을 넣을 수 있고, ‘부지런히’나 ‘바지런히’를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 정력적 활동을 보여주다 → 부지런히 일하다 / 부지런히 애쓰다
└ 정력적인 웅변가 → 힘이 넘치는 웅변가 / 기운찬 웅변가
알맞게 쓸 말을 부지런히 찾을 일이고, 신나게 살필 일이며, 꾸준히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 부지런히 우리 말을 알뜰히 가꾸면 우리 매무새도 부지런해지는 가운데 우리 생각과 삶 모두 부지런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신나게 우리 말을 돌보면 우리 매무새를 비롯해 우리 생각과 삶 모두에 신과 기쁨이 가득 넘치게 됩니다. 누가 시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가 몸소 나서서 우리 말을 돌아보고 곱씹을 수 있으면 우리 매무새며 생각이며 삶이며 아름다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찾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멋입니다. 살피는 사람한테만 느껴지는 보람입니다. 돌아보는 사람한테만 맺히는 열매입니다.
ㄴ. 정력적으로 돌아다녔다
.. 츠시마에서는 여러 곳을 정력적으로 돌아다녔다 .. 《이진희/이규수 옮김-해협, 한 재일 사학자의 반평생》(삼인,2003) 234쪽
나이든 분들과 젊은 사람 움직임은 같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으로서는 어려움 없이 다니는 일이지만, 나이든 분으로서는 숨이 차는 일이 되곤 합니다. 거꾸로 젊은 사람은 벅차다고 하지만, 나이든 분들은 멀쩡하기도 합니다.
몸을 잘 다스리면 나이가 들어서도 늘 힘이 넘치게 살고,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젊다고 하여도 언제나 힘이 부치기 마련입니다.
┌ 정력적으로 돌아다녔다
│
│→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 힘내어 돌아다녔다
│→ 쉴새없이 돌아다녔다
│→ 눈썹 날리도록 돌아다녔다
│→ 바삐 돌아다녔다
└ …
많이 배우면 그만큼 더 똑똑해지면서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쓸 듯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우는 분들일수록 오히려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면서 말이나 글을 잘 못하는 모습마저 으레 봅니다. 머리에 담기는 지식은 늘어나는데, 이 지식들을 간수하는 법까지 못 배우기도 하지만, 지식을 제 한몸 돌보는 데에만 쓰려고 하니 그렇습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지식이 늘면 지식을 나누고 힘이 늘면 힘을 나누며 이름이 늘면 이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지 못하는 지식과 힘과 이름은 되레 제 넋과 얼을 갉아먹습니다. 집구석에 쌓아 두기만 하고 쓰지 않는 돈이 제 삶과 마음을 갉아먹듯, 머리속에 가두어 놓는 지식은 제 몸과 생각을 갉아먹고 맙니다.
풀어야 홀가분하고, 푸는 가운데 더 늘어납니다. 돈은 집구석이 아닌 둘레 사람들하고 나누어야 홀가분하며, 이렇게 푸는 가운데 살림살이가 더욱 빛나게 돼요. 지식도 풀어야 홀가분하며, 푸는 동안 차츰 깊어집니다.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지식으로 여미어야 합니다.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지식으로 갈고닦아야 합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이웃과 나눈다고 할 때에는 내 눈높이가 아닌 이웃 눈높이로 나누는 일입니다. 내가 주고픈 대로 주는 나눔이 아니라, 내 이웃이 바라는 대로 추슬러서 함께하는 나눔입니다. 이만큼 하면 되겠지, 하고 건네면 받는 쪽에서 버겁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하고 깨달을 때까지 건네는 쪽부터 스스로 높낮이를 헤아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참을성 있게 더 손쉽고 가슴에 와닿을 말로 풀어내어 들려주던 부처님이며 하느님입니다. 늘 듣는 사람들 눈높이에서 살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처님과 예수님을 따른다는 수많은 제자들은 당신한테 새롭게 제자가 되는 이들한테 더 손쉽고 가슴에 와닿도록 낮은자리로 무릎 꿇는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어떤 눈높이로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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