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제호 옆에 자리한 문구다. 시민이 '기자'라는 말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계에서도 매우 낯설었다. 나 역시 <오마이뉴스>를 2002년부터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들락거렸지만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인터넷 신문에 무슨 기자가 이렇게 많은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 시민 스스로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5년을 종이신문 독자처럼 기사만 읽다가 한 출판사가 유럽여행권을 상품으로 독후감을 공모하는데 거기에 응모-그것이 기사 작성인 줄 몰랐음-했다. 그때가 2007년 5월 1일이다. 독후감은 '생나무'였다.
한 달 후 볼프강 쉬벨부쉬가 지은 <철도여행의 역사>를 읽고 '3년 동안 매주 진주서 수원까지 기차를 탔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첫 '잉걸' 기사다. 2007년 6월 8일이다. 5년을 기사 읽는 것으로 <오마이뉴스>에 들어왔지만 한 번 쓰기 시작하니 하루라도 기사를 쓰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을 정도였다.
2007년 6월 8일부터 기사를 썼으니 오늘(10일)로 1년 8개월이 되었다. 1년 8개월 동안 쓴 기사가 675개다. 기사 수준(?)은 별 볼일 없다. 잉걸 619, 버금 42, 으뜸과 오름은 각 7개씩이니 아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중 가장 수준 낮은 기자라고 확신한다. 잉걸 기사만 쓰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오마이뉴스> 기사 수준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잉걸 기사만 쓰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톱과 오름, 으뜸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빛이 발할 것이다.
기사 수준은 별 볼 일 없지만 <오마이뉴스>가 대단함을 몇 번 경험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방송사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 해 3월 2일 "사교육 시키지 않는 '월수 150' 아빠의 노하우" 기사를 쓴 이후 <교육방송>을 비롯하여 방송사 두 곳에서 연락이 왔다. 요즘 같은 사교육 열풍에 어떻게 아이들을 학원도 보내지 않고 공부를 시킬 수 있는지 방송 출연을 요청하는 쪽지가 왔지만 자랑할 만한 교육 방법이 아니라 거절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나는 휴대전화기를 11년째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경남 진주 YWCA에서 오래된 물건을 쓰는 사람들을 뽑는 '우리시대 짠돌이 페스티벌'이 있었다. 그 대회에 참여하여 일등상인 '하늘상'을 받았다.
하늘상을 받은 일로 지난 해 11월 15일 '10년된 휴대전화로 일등 먹다'라는 기사를 썼다. 전화 올 일이 별로 없는 우리 집에 전화소리가 자주 들렸다. 어떻게 11년 된 휴대전화기를 아직까지 사용할 수 있느냐면서 취재와 제작을 하고 싶다는 작가들이었다.
"사교육 시키지 않는 '월수 150' 아빠의 노하우" 때는 거절했지만 10년 된 휴대전화기는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난 해 11월 25일 진주 KBS 라디오 <지금은 정보시대>에 나갔다. 어머니 태에서 나와 처음으로 방송국에 갔다. 이것저것 많이 물었지만 다 말할 수는 없고, 진주 KBS <지금은 정보시대>에 들어가 다시듣기를 보면 내 녹화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은 보이지 않는 액정에… 투명 테이프를 꽁꽁 묶어 놓은 휴대전화가 10년이란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심지어 요금제도 살 때 가입했던 기본요금 구천 원에 한 달 통화료가 만 사오천 원 정도라고 한다. 그의 이런 절약정신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진주 KBS <지금은 정보시대> 2008.11.28)진주 KBS뿐만 아니다. 지난 해 12월 모 방송국-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있음-에서 연락이 왔다. 독특한 배우자와 사는 부부 대상 프로그램이었다. 10년 동안 휴대전화기를 사용한 것이 1, 2년도 안 된 휴대전화기를 교체하는 요즘 세태와 달랐던 모양이다.
12월 2일 서울에서 작가가 진주 우리집까지 직접 내려와 촬영을 위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 가족이 집에서 머리깎는 일, 잠깐 방을 비워도 형광등을 끄고, 가족 휴가도 친척이 함께 시골 어머니댁에서 보내는 일이 남달랐던지 12월 5일(금) 서울에서 촬영팀이 우리 집에 직접 내려와 촬영하기로 했다. 12월 10일은 우리 부부가 방송국에 나가 녹화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우리 부부만 가려고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방송국 아닌가.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들떴다. 방송국이 어딘가? 그것도 아빠와 엄마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온다니. 아이들은 '현장체험학습' 신청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사람살이는 바람대로만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작가가 12일은 어렵다, 13일 하면 안 되겠는가? 다음 날이 주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럼 15일에 하기로 했다. 방송국 녹화는 일주일 뒤로 미루기로 했다.
다음 날 또 전화가 오기를 연말이라 특집 프로그램이 많으니 촬영을 연말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연락이 왔다.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부랴부랴 학교에 연락하고, 들뜬 마음을 정리하면서 연락오기만을 고개 들어 기다렸다.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연락이 없다. 전화해서 물어 볼 수는 없고, 어떤 분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인지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은 비교가 안 되는 독특하고 대단한 분들이었다. 우리 가족이 출연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독특한 것이냐고 비판 글이 수없이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연락을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감사했다. 현장체험학습 신청서까지 제출하면서 방송국 여행에 들떴던 우리 아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데 <오마이뉴스>는 나를 그만 동화 원작가가 되게 했다. 지난해 12월 5일 쓴 "아이들이 누른 '사랑의 전화'"를 읽고 한국방송(KBS) 어린이 프로그램인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쪽지가 왔는데 "아이들이 누른 '사랑의 전화'를 원작으로 삼아 <TV 동화 행복한 세상>을 제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은 그림으로 만든 동화다. 동화를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지, 서로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자기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이끄는 프로그램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작가가 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과 부부대상 프로그램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동화 원작가로 살아가는 일보다는 못하리라. 계약서가 왔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방송국과 계약을 맺다니.
<오마이뉴스> 때문에 라디오도 출연했고, TV 프로그램 출연까지 할 뻔했다. 그리고 동화 원작가가 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방송은 5월쯤 한단다. <오마이뉴스> 고맙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 일' 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