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농한기와 일철
.. 그러니까 농한기 말구 요즘 같은 한창 일철엔 그래요 .. 《민족문학작가회의 여성문학분과위원회 엮음-여성운동과 문학 (1)》(실천문학사,1988) 12쪽
우리는 ‘시골’이라는 말보다 ‘농촌(農村)’이라는 말을 즐겨씁니다. 아니 시골에 사는 사람은 스스로 ‘시골’이라 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이라는 낱말에 다른 뜻이나 생각을 품곤 합니다. 나라와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손수 땅을 부쳐 먹고사는 삶하고 거리가 멀어지면서, 시골살이란 얼른 집어치울 일처럼 여겨 버릇하고, 도시살이가 사람다이 살 일인 듯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몇몇 사람이 논밭을 부치며 살아가고자 시골로 가곤 하는데, 이들을 바라보며 훌륭하다고 손뼉치는 사람보다 끌끌끌 혀를 차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 농한기(農閑期) : 농사일이 바쁘지 아니하여 겨를이 많은 때
└ 농번기(農繁期) : 농사일이 매우 바쁜 시기
우리 나라는 얼마나 나라다움을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저마다 나다움을 고이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다 다른 사람이니 다 다른 꿈을 품으며 다 달리 배우며 다 달리 크도록 너르고 살가이 풀어놓여져 있는지, 모두 다른 사람인데 모두 똑같은 지식만 머리속에 집어넣고 똑같은 시험을 치러 더 높은 점수를 받도록 길들어지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라가 나라다울 때 삶터가 삶터다웁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나라가 엉망이어도 조그마한 마을 하나는 홀로 튼튼히 우뚝 설 수 있을 테지만, 이제 어느 작은 마을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벌이는 숱한 막개발에 쫓기고 밀리고 무너집니다. 큰뜻에 따라 작은뜻은 묻어야 한다면서 용역 철거꾼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밀어냅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 삶은 우리 삶다움을 지킬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지킬 수 없는 자리에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고, 우리다움을 추스를 일과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자리라면, 우리가 하는 말과 쓰는 글이 말답고 글답기 어렵습니다. 뒤틀리고 맙니다.
┌ 겨를철 - 놀이철 / 쉬는철
└ 일철 - 바쁜철
일을 하니까 ‘일꾼’입니다. 일을 할 거리이니 ‘일거리’요 ‘일감’입니다. 일하는 곳이니 ‘일터’입니다. 밤에 일을 하니 ‘밤일’이요, 낮에 일을 하니 ‘낮일’입니다. 뜻 모은 사람들이 함께 장사하여 ‘동무장사’이듯, 동무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동무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일하느라 바쁜 때를 가리킬 때에 저절로 ‘일철’이라는 낱말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일을 하지 않고 쉬거나 놀 때에는 무엇이라고 가리키면 될까요. 말 그대로 ‘놀이철’이나 ‘쉬는철’이라 하면 될 테지요. 노는 사람이라 ‘놀이꾼’이고, 놀이를 할 거리라 ‘놀이거리’나 ‘놀이감’입니다. 노는 곳이라 ‘놀이터’이고, 밤에 놀아 ‘밤놀이’, 낮에 놀아 ‘낮놀이’입니다.
시골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일철’과 맞물려 ‘겨를철’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을 부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시골사람 삶자락이 아닌, 시골사람이 거둔 곡식을 돈으로 사다 먹는 도시사람 삶자락에 따라서 ‘농번기’와 ‘농한기’라는 낱말만 쓰입니다. 농사짓는 시골사람 스스로 ‘일철-겨를철’이라고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 왔으나, 농협 직원 말매무새에 길들고 정부에서 쓰는 말본새에 익숙해지면서, 시골사람들마저 제 말씨와 말투를 버리고 ‘농번기-농한기’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마치,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똑같이 방구석에서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사이 똑같은 말씨에 길들고 익숙해지듯이. 연변 조선족이 북녘말을 쓰다가 남녘 텔레비전 연속극을 자주 보는 사이 당신들도 모르게 남녘 말씨를 쓰게 되듯이.
ㄴ. 세겹살
.. 우리는 세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즐겁게 마시며, 초저녁에 데크에 나와 앉아 양주 한잔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새집 짓기를 즐기며, 벤치와 의자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 《이대우-새들아, 집 지어 줄게, 놀러오렴》(도솔오두막,2006) 204쪽
‘데크(deck)’란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영어사전을 뒤적이니 미국말로 ‘테라스’와 같다고 나옵니다. 다만, “나무로 지은 테라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테라스(terrace)’를 다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는데 ‘terrace = 테라스’로 나오거나 “작은 발코니”라고 나옵니다. 또 한 번 ‘발코니(balcony)’를 찾아봅니다. 그러니 ‘balcony = 발코니, 또는 노대’라고 나옵니다. 이리하여, 국어사전에서 ‘노대(露臺)’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노대 = 난간뜰’이라고 나옵니다.
저마다 조금씩 달라, 데크니 테라스니 발코니니 할 텐데, 이 세 가지가 어떻게 다른가를 꼼꼼히 알면서 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살림집에 붙이는 그 ‘문간마루’나 ‘창문마루’ 같은 자리를 가리킬 때에 이렇게 나라밖 이름만 따와야 할까 궁금합니다. 나라밖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바로 우리들이 사는 집에 붙이는 이름인데, 우리들은 왜 우리 이름을 붙이지 않는지,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이름 붙일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보기글을 보면 “벤치(bench)와 의자(椅子)”를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고 나오는데, 영어 ‘벤치’는 ‘긴 의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긴의자와 의자”를 만든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때에는 그냥 ‘걸상’을 만든다고 하면, 걸상에는 긴 녀석이 있고 짧은 녀석이 있고 폭신한 녀석도 있는 만큼, 자연스레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싶어 아쉽습니다.
┌ 세겹살 = 삼겹살
└ 삼겹살(三-) : 돼지의 갈비에 붙어 있는 살. 비계와 살이 세 겹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기이다
한편, 보기글을 쓴 분은 ‘三겹살’이 아닌 ‘세겹살’을 구워 먹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테라스와 발코니하고 또 다른 ‘데크’에서 양주 한잔 걸치기를 좋아하는 분이라고 하면서, 이 대목에서는 뜻밖에도 ‘세’라는 토박이말을 넣으며 이야기합니다.
잠깐 아리송합니다. 글을 잘못 읽었나 싶어 거듭 읽고 다른 자리를 살펴보는데, 글쓴이는 틀림없이 다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세’겹살이라고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 고기구이집을 살피면, 거의 모든 집에서 ‘삼’겹살만 다룹니다. 살이 다섯 겹일 때에는 ‘다섯’겹살이건만, 이때에도 ‘五’겹살이라고만 합니다. 저는 이때까지 수많은 고기구이집 가운데 딱 한 군데에서만 ‘세’겹살이라고 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 한겹살 / 두겹살 / 세겹살 / 네겹살 / 닷겹살(다섯겹살)
└ 일겹살 / 이겹살 / 삼겹살 / 사겹살 / 오겹살
골목이나 찻길마다 다른 골목이나 찻길하고 이어질 때면 여러 갈래가 됩니다. 이때 ‘두거리’나 ‘세거리’나 ‘네거리’나 ‘닷거리’가 됩니다. 때로는 ‘여섯거리’나 ‘일곱거리’도 될 테고요. 그러나 교통정책을 꾸리는 공무원이든 경찰이든, 그냥저냥 자동차 모는 사람들이든 하나같이 ‘이거리-삼거리-사거리-오거리’만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노래꾼은 ‘세 박자’를 노래했습니다만, 이이가 애써 ‘세 박자’를 노래했어도, 이 나라 초등학교 노래책에는 ‘세 박자-네 박자’가 아닌 ‘삼 박자-사 박자’라 적히거나 교사들 입에도 이런 ‘三-四’가 익숙합니다. 그나마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군대사열을 시킬 때에는 용케 ‘하낫! 둘! 셋! 넷!’ 하고 소리를 붙입니만.
국어사전을 다시 뒤적여 ‘세겹살’을 찾아봅니다. 국어사전에 번듯하게 올림말로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뜻풀이는 안 달립니다. ‘세겹살 = 삼겹살’이라고 밝힌 뒤 ‘삼겹살’을 찾아보도록 다룹니다. 다른 토박이말도 으레 이와 비슷하게 대접을 받습니다. 예부터 써 왔건 사람들이 익히 쓰건, 국어사전은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대접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말 대접이란 똥대접이기 때문에, 이처럼 해 놓는 일이 ‘올바른(?) 우리 말 대접’이라 할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으며, 세상이 세상다울 수 없는 이 땅에서는 책이 책다울 수 없는데다가 말이 말답지 못합니다. 우리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거나 나눌 자유가 없이 국가보안법에 짓눌리고, 우리 마음을 스스럼없이 펼치거나 함께할 권리가 없이 통신검열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자리에 학문이 학문답게 뿌리를 내립니다. 세상이 세상다울 수 있는 터전에 말이 말답게 줄기를 뻗습니다. 얼과 넋이 얼과 넋다이 아름다울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들 일과 놀이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이 가득한 일과 놀이로 새로워지거나 새삼스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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