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군대 시절 천주교회에 다닌 관계로, 먼 발치에서 잠시 뵈온 적이 있는 그분. 그분을 위해 잠시 묵상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성자가 살다가 떠난 자리는 아주 먼 지구 반대편까지 그 정신의 향기가 닿는다는 말. 종교를 넘어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존경 받는 그 분이 가시는 길. 2월의 그윽한 매화 향기가 가시는 걸음 걸음 뿌려지는 듯 하다.
새벽 산책길 나서면 으레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한다. 어두운 하늘이 점점 파란빛으로 변하는 새벽길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난 일을 많이 돌아보게 되고, 주변의 보잘 것 없는 풀과 나무에 새삼스레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살면서 늘 풍족하지 못한 가난이 싫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것이다. 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가졌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무엇보다 엄청난 자연의 은혜를 받았다. 조금 걸어가면 넓은 바다, 그리고 산과 들, 마을의 도서관, 문화시설, 쌈지 공원 등 나를 위해 다 건립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새벽 산보 하다보면, 온 동네 쌈지 공원이 내 정원이 된다. 새벽이란 시간은 분주한 대낮에 비해 공원 이용하기가 호젓해서 좋다. '쌈지 공원'의 '쌈지'란 담배, 돈, 부시 따위를 싸서 가지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 가죽, 종이, 헝겊 등을 이른다. 생각해 보면 마을의 공공시설 은 쌈짓돈처럼 귀한 은혜다. 좁은 주택 공간에서 생활하는 나의 마당 같은 쌈지공원.
장산 신시가지 아파트 중심에 자리한 이 와우 쌈지공원은 언제나 햇빛이 따뜻하다. 주위의 건물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어, 공간이 넓고, 이웃 동네 사람들 우리 동네 아이들 다 모여 한동네 식구가 된다. 동네 쌈지 공원에 나오면 초면이라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누게 된다.
추운 겨울 지내기에 소원했다가, 만나는 공원의 가로수와 풀과 고독한 의자에게도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쌈지 공원의 가로수들은 생각하면, 내 마당 안에 내가 심은 나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도롯가의 가로수보다 친근하고 정이 들어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추운 겨울을 견뎌온 매화나무 언제 이렇게 혼자서 꽃을 활짝 피운 것인가. 정말 대견하고 고맙다 ! 이웃나무들도 어서 어서 꽃샘 추위 이기고 꽃을 활짝 피우길 기도해 본다.
코를 끙끙 거리며 쌈지 공원 동산에 올라보니, 며칠 전 내린 봄비로 쑥쑥 파란 풀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곧 꽃망울을 틔울 듯 말듯 …작은 숲 속에는 벌써 버들개지, 들찔레, 탱자나무 등도 봄, 봄, 봄이 왔음을 알린다.
희뿌연 여명 속에 하얀 설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자태는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모자란다. 우리네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사군자의 매화, 매화는 벚꽃과 그 생김새가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꽃줄기가 짧으면 매화, 꽃줄기가 길면 벚꽃이 틀림 없다. 매화는 꽃이 먼저 피고 잎사귀가 나중에 핀다. 벚꽃이 흔한 부산, 더구나 도심의 삭막한 공간에서 매화나무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쌈지 공원 와우 공원은 해운대 와우산 이름을 따서 와우 공원. 근처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학교가 움집해 있고, 고층 아파트가 많이 움집해 있다. 조경이 뛰어난 대천공원과 거미줄 공원에 이웃한 와우공원은 큰 도로변에 있다.
얼굴을 바늘처럼 톡톡 쏘는 듯한 꽃샘바람 속에 흰 매화. 마치 어느 고결한 성인 한분을 만나고 가는 길처럼 매화 향기 길게도 콧끝에 맴돈다. 매화는 성인군자에 비유되는 꽃이다. 상사화처럼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이 피는 탓일까. 매화나무 피면 먼 곳에서 그리운 친구가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매화는 꽃도 보기 좋지만, 매화나무에서 얻는 매실은 위장병과 체질 개선에 좋다고 한다. 부산 시내 많은 벚꽃 가로수들을 조금씩 매화나무로 바꾸어가는 것은 어떨까. 일본의 국화라서 너무 말이 많은 벚꽃에 비해 매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에 비교되지 않는다. 먼 길을 떠나는 성인의 걸음 걸음 뿌려질 고결한 향기 같이…
매화 피다커늘 산중에 들어가니봄눈 깊었는데 만학이 한 빛이라어디서 꽃다운 향내는골골이서 나느니,'무명씨-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