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띈 EBS 다큐 인(人),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화가 아내와 경상도 남편의 행복한 암 투병기라고 했다. 3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한 화가 아내와 그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남편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암환자들이 나오는 여느 프로그램과 달리 우울하지 않아 좋았고, 눈물이 없어 좋았다. 그리고 암환자인 그 분이 화가라는 게, 아니 열심히 무언가를 하며 살아간다는 게 더더욱 좋았다.
그 프로를 보고 있자니, 작년에 동생과 내가 티비에 출연할 뻔했던 그 일이 떠올랐다.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겼던 일, 결국엔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그 일 때문에 동생과 나는 한 달 동안 참 들떴고 행복했었다. 우리도 그때 방송에 출연했더라면 내가 본 며칠 전 티비 속 그 부부처럼 사람들에게 행복을, 기쁨을, 꿈을 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혼자 생각해본다.
작년 여름 나는 <가족인터뷰>로 "나는 꿈꾸는 암환자, 히말라야에 가고 싶어"란 글을 적었다. 어린 나이에 암이란 병에 걸렸지만 그래도 항상 꿈꾸고, 노력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동생 이야기를 글로 적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셨는지, 힘내라는 쪽지를 많이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의외로 방송국에서도 연락을 많이 해왔다. 흔히 말하는 ‘인간극장’류의 프로그램에서는 모두 연락을 받았던 듯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동치미부터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방송에 출연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전화들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은 뜻밖에 그런 전화들을 즐거워 했다. 방송 작가들이 묻는 질문에도 착실하게 대답을 잘 해주곤 했다. 물론 전화를 끓고 나면 ‘어떻게 질문하는 게 전부 똑같은지 몰라,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서는 의사선생님이 누구인지…’ 하고 투덜대곤 했는데 굳이 오는 전화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이야기가 어떤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엔 너무나 평범했던지 다시 연락을 해 오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까, 예전에 연락이 왔던 어느 방송국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지금은 종영되었는데, ‘내 생애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여행, 시한부 환자와 가족의 마지막 가족 여행’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있었다. ‘시한부 환자’이니 ‘마지막’이니 이런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동생과 나는 ‘여행’이라는 두 글자에 빠져서 방문을 허락하고 말았다.
동생과 나는 ‘암 환자’들이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에 항상 불만이 많았다. 항상 눈물짓는 가족들과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환자들(그러나 나는 지금은 왜 가족들이 그렇게 우는지 환자들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내는지 다 이해한다)이 참 싫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암환자도 저렇게 여행을 하는구나, 저렇게 활기차게 사는구나, 그런 걸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하는 모습을 찍게 되더라도 그 여행은 패키지 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주 토요일 늦은 오후에 12개들이 음료수 한 상자를 들고, PD와 작가가 우리 집으로 왔다. 거실도 없는 집인지라 작은 식탁에 PD, 작가, 동생, 나 이렇게 옹기종기 앉았다. 그리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굴을 익히려고 방문한 거라고 했다.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들를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공짜 여행에, 더구나 해외로 보내준다고 했으니, 거기다 출연료까지. 내 얼굴이, 내가 사는 집이, 내가 사는 모습이 전국에 방송되겠지만, 여행만 보내준다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동생과 나는 여행이 좋았다. 여행만 보내준다면, 여행만 보내준다면….
동생과 나는 여행만 보내준다면 방송에서 요구하는 그 어떤 설정 장면들도 다 찍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은 둘이 장을 보고 오면서는, 우리 방송 찍으면 유기농 채소 사러 가는 것도 찍어야 겠다, 크크크, 하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방송 찍으면 고향 집에도 한 번 갔다와야 겠지? 다들 방송에서 그러니까, 그런데 엄마가 울면 어떡하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여행만 보내준다면 엄마, 아빠를 방송 출연하시도록 꼭 설득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여행만 보내 준다면….
그날부터 동생과 나는 휴먼다큐 방송을 유심히 보았다. 아, 저건 설정이구나, 저것도 설정이네, 그러면서 우리가 방송을 찍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나름 공부라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PD는 종종 전화를 해서 이것 저것 질문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어떻게 찍을 것인지 구성을 짜는 듯했다. 그리고 여행은 동남아 쪽으로 상품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때 마침 나는 여권을 바꿔야 했기에 정말 부리나케 여권까지 새로 만들었다. 여권이 새로 나오기 전에 여행 떠나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까지 해 가면서.
동생 인터뷰 글에서도 적었지만, 동생은 ‘아라시’라는 일본 그룹 팬이다. 마침 작년 그때쯤 일본에서는 아라시 콘서트가 있었고 동생은 그 콘서트에 가고 싶어했다. 돈이 없어 갈 수는 없고 매일 옥션에 들어가 티켓 값만 확인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찍을 그 프로그램에서 일본으로 여행가는 걸 찍으면 좋을 텐데,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직 어느 곳으로 여행 갈지 안정해 졌으면 일본으로 가는 걸 찍으면 좋겠다고, 콘서트 보러 가는 것도 찍고 그러면 좋겠다고.
혼자서 어찌나 매일 콘서트 가고 싶다, 가고 싶다 노래를 하는지, 그럼 그렇게 고민만 하지 말고, 네 생각을 PD에게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말을 했는데도 안되는 것과, 얘기를 안 해서 못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 그랬더니 그날 밤 동생은 PD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자기는 ‘아라시’를 정말 좋아하고, 여행하는 걸 찍기로 한 만큼 일본으로 가고싶다고. 그리고 다음날 PD에게 연락이 왔다. 아라시란 그룹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며칠 뒤 다시 PD가 전화를 했다. 일본은 안된다고 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엄청난 실망이 담긴 목소리로 “안돼요?”라고 말했고,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PD는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일본이 안되면 동남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PD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너무나 적극적인 우리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동생이 실망으로 내뱉었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렸던 것일까.
결국 우리는 여행을 가지도 못했고, 방송에 출연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 되돌려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 한 달 동안 우리는 즐거웠고 행복했다. PD가 왜 다시 연락을 안했는지만 알면 더 좋겠지만.
우리는 다만 즐거운 암환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우리는 여행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동생은 '아라시'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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