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자 묵점 기세춘(奇世春·75) 선생이 '묵자(墨子)'의 완역본과 해설서가 포함된 '묵자' 결정판(바이북스·2009)을 내놓았다.
묵자 결정판은 기 선생이 지난 1992년 국내 최초로 완역한 '묵자' 완역본을 손질하고, 그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덧붙였다. 또한 왜곡된 묵자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부분 선생의 독자적인 주해를 더했다.
이 책은 해설부와 번역부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해설부에서는 묵자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번역부에서는 현존하는 '묵자' 53편 중 비성문(備城門), 영적사(迎敵祠) 등 방위 전술을 기록한 11편의 병서를 제외하고 나머지 42편을 모두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수록했다.
2천년 동안 금서였던 '묵자' - 왜 묵자인가?
기 선생의 '묵자 결정판'에 따르면, 묵자(BC 470?-390?)는 춘추전국시대 공자(孔子)와 더불어 공묵(孔墨)이라 일컬어질 만큼 제자백가의 '거두'였다.
그러나 BC 136년 한(漢) 무제(武帝)때 백가를 폐출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자 권력의 탄압을 피해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
이후 묵자는 유가와 법가의 책에서 단편적으로 거론될 뿐 자취를 감추었다가 17세기 초 도가(道家)의 경전 속에서 발견되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18세기가 되어서야 최초의 주해가 나오고,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중엽에서야 소개된다. 인류사에 이처럼 2000년이 넘도록 금서였던 책은 아마 묵자가 유일할 것이라고 기 선생은 말한다.
기 선생은 묵자의 사상을 유가나 도가와는 다른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말한다. 묵자에는 유가들의 예악을 비판하는 글이 곳곳에 등장하며, 또한 묵자는 인민들과 더불어 산 노동자였으므로 세상에 회의와 염증을 느껴 속세의 문화와 제도를 거부한 노자·장자와도 다르다는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묵자는 '반전 평화운동'과 '절용 문화운동'을 전개한 '사회운동가'였으며, 인류 최초로 우주와 공간과 시간을 말한 '철학자'요, 정교한 가격이론을 제시한 '경제학자'라고 기 선생은 말한다.
또한 무엇보다 묵자는 신분 계급과 노예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고대 사회에 천하 만민에게 두루 평등한 사랑을 외친 '평등주의자'요, 박애주의자'였다는 것. 따라서 묵자는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사상가였다. 그렇기에 현재까지 그의 사상은 유효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상가라고 기 선생은 강조한다.
공자를 알려면 묵자를 알아야 하고, 진보를 말하려면 묵자를 읽어야 한다
기 선생은 공자를 알려면 묵자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등용을 바랐으나 아무도 등용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쓸쓸이 죽었다. 반면, 묵자는 공민 계급인 목수 출신으로 초나라와 월나라 등 여러 곳에서 봉토를 주겠다고 제의했음에도 귀족 신분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노종자의 검은 옷을 입고 '절용(節用) 문화운동'을 펼쳤다는 설명이다.
공자와 묵자는 보수와 진보의 쌍벽이었으므로 서로 비난했는데, 묵가들은 유가들의 지혜가 갓난아기보다 못하다고 조롱했고, 유가들은 묵가의 평등주의는 아비 없는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 선생은 공자와 묵자는 한쪽만 읽으면 평가할 수 없고 공묵을 아울러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 선생은 또 진보를 말하려면 묵자를 읽어야 한다면서 묵자는 곧 '노동운동의 시조'이고, '반전평화운동'의 시조이며, 만민평등론과 인민주권설을 주장한 '민주적 정치사상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묵자는 인류 최초로 인간만이 노동을 하는 동물임을 발견한 사상가이다. 그는 짐승과 새들은 수놈이 밭 갈고 씨 뿌리지 않고 암놈이 실 잣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먹고 입을 것을 모두 하늘이 이미 마련해 주었지만, 오직 사람만이 다른 짐승들과는 달라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천명했다는 것.
따라서 공자의 학문이 군주와 귀족 등 지배계급에 유세하여 관직에 나가 입신출세하려는 선비 계급을 위한 학문이었다면, 묵자는 공민 계급인 목수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천대받던 노동자들과 헐벗고 굶주린 민중의 해방을 위한 학문이었다고 기 선생은 강조하고 있다.
실제 묵자는 신분차별과 사유재산제를 반대하고, 인민 모두 평등하고 두루 살리는 공산공생(公産共生) 대동사회를 지향했다는 설명이다.
묵자는 또 400여년 동안 전란이 계속된 춘추전국시대를 살면서 전쟁이야말로 하늘의 뜻에 반하는 악의 근원이며 평등공동체를 파괴하는 제1의 장애물로 생각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침략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잘려가 침략 받는 나라에는 제자들을 보내 방어 임무를 맡게 하고 자신은 홀로 침략국 군주를 만나 전쟁중지를 담판하는 '반전 평화운동가'였다는 것이다. 특히, 묵자는 전쟁을 경제학적 소비제도로, 인류학적 문화제도로 고찰했고, 백성이 궁핍한 것은 지배계급의 초과 소비의 낭비문화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고 기 선생은 말한다.
그러면서 묵자는 "먹고 입고 따뜻하고 쓰기에 편리하면 그것으로 그치고 인민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묵자는 '만민평등'의 정치는 의로운 것이며 차별의 정치는 폭력이라고 말하고, 재산의 상속과 사유제를 반대한 진보주의의 시조라고 기 선생은 평가한다. 그러면서 "보수를 알려면 공자를 읽어야 하겠지만, 진보의 진면목을 알려면 반드시 '묵자'를 읽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예수를 알려면 묵자의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고 문익환 목사는 "묵자의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과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말했다고 기 선생은 전하면서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들은 묵자를 읽음으로써 예수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묵자는 그의 어록 '묵자'에서 300여 차례나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53편은 모두 일관되게 겸애(兼愛)와 교리(交利)라는 하느님 사상을 기초로 진술된 글"이라면서 "놀랍게도 신약성경과 똑같은 말이 너무도 많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기 선생은 예수 탄생을 축하하러 갔던 동방박사가 중국에서 사라진 '묵가'일 것이라는 여러 정황도 제시한다.
또한 기 선생은 '구약성경'과 '묵자', '논어' 등이 거의 같은 시대에 기록된 문서라는 점을 특별히 주목한다. 이것들은 이른바 차축시대(axial age)의 인류적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구약의 신 야훼는 전쟁신이고 부족신의 요소가 강한 데 반해 묵자의 하느님은 평화와 민중해방의 신으로서 인류적 보편신이라는 점에서 500년 후에 예수의 신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
따라서 예수가 말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묵자의 하느님은 반드시 검토해야 할 대상이라고 기 선생은 강조한다.
'묵자'는 반동의 시대에 필독서
기 선생은 현 시대에 대해 "오늘 지구촌 곳곳에서는 지금도 전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특히 인종말살을 외치는 전쟁신 야훼를 믿는 이스라엘은 민간인에게 무차별 미사일 공격을 퍼붓고, 이에 대항하여 알라신을 믿는 팔레스타인들은 자살 폭탄테러로 맞서고 있다"면서 "이것이 예수와 공자와 부처를 믿는 종교인이나 이성을 믿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서울 용산에서는 재개발 사업자를 위해 철거민과 진압경찰이 불에 타죽은 야만적인 사건이 터졌으나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서 "세계가 물신(物神)의 광신도가 되어 미쳐가고 있다, 우리 모두 보험금을 타내려고 친척을 무참히 살육하는 사이코패스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 선생은 또 "종교는 길을 잃었고, 풍요와 번영을 약속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치닫고 있다"며 "지구는 파멸되어가고 세상은 살육의 아수라장이 되어 간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이제 인류는 회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인류의 종말을 심각히 고민해야 할 때"라며 "그렇기에 이 책 '묵자'는 2500년 전 문명비판가인 묵자를 기억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묵점 선생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 싸운 재야 지식인'으로, 또는 '동양고전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좌파 사상가', '묵자 전문가', '재야 한학자' 등으로 불린다.
그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유명한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으로 193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북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혁명사를 연구하는 한편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바탕으로 고전 번역에 힘써왔다.
1960년 4·19혁명에 가담했고, 1963년에는 동학혁명연구회를 만들어 후진국개발론, 통일문제 등을 파고들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신영복 교수 등과 함께 '통혁당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했다.
1990년대초까지 당국의 감시를 받던 그는 '세상이 갑갑해서' 시작한 동양고전 번역작업의 첫 작품으로 '묵자-천하에 남이란 없다(1992)'를 출간했다. 이후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서 그 책을 읽고 기세춘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아 94년에 함께 '예수와 묵자'를 출간했다.
또한 같은 해 신영복 교수와 '중국 역대시가 선집' 4권을 공역했고, 2002년에는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로 유가·묵가·도가·주역을 출간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동양사상 바로알기'를 주제로 '동양고전산책 상·하'를 출간했고, 2007년에는 고전 재번역운동의 일환으로 '장자'를 완역했으며,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성리학개론 상하'를 출간했다.
한편, 기 선생은 '묵자' 결정판 서문에서 '묵점(墨店)'이라는 아호에 대해 사람들이 '묵자에서 연유된 것이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 이름이 '묵점'이어서 그렇게 지은 것인데 공교롭게도 '묵'이라는 글자가 돌림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