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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교수라는 이름보다 시골 이장이라는 이름이 한결 잘 어울린다고 하는 강수돌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지난 열 몇 해에 걸쳐 여러 가지 책을 펴냈고 여러 매체에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 많이 쓰는 교수님이야 나라안에 제법 많은데, 여느 교수님이나 지식인하고 강수돌 님은 사뭇 다릅니다. 저는 이분 책을 1999년에 나온 《작은 풍요》부터 《노동의 희망》을 거쳐 《일중독 벗어나기》를 읽어 왔는데,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분이 쓰는 글은 차츰 ‘쉬워’진다고 느낍니다. 지식을 뽐내는 말투가 줄어들고, 가방끈을 자랑하는 듯한 낱말이 사라집니다.

 

 강수돌 님 또한 여느 교수님이나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의’과 ‘-적’을 쓰기는 쓰지만, 여느 교수님이나 지식인하고 견주면 “거의 안 쓴다”고 할 만큼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무게가 가볍습니다. 아니, 꼭 알맞춤한 무게입니다. 그러면서 한결 깊이가 있습니다. 좀더 너비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존재’라는 낱말을 써야만 느낌이 산다고 하지만, 강수돌 님 같은 분이 쓰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 말 한 마디에 담기는 무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린이들이 우리 살림살이를 곰곰이 헤아려 보도록 도와주는 책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을 읽으면서 더욱 놀랍니다. 어린이책이니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자면 말씨를 더욱 가다듬고 추슬러야 했습니다만, 이렇게 하더라도 교수님 말씨나 지식인 말결이 가시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이라는 책을 읽는 동안, 할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을 덮은 뒤에는, ‘이와 같은 글쓰기는 어린이책에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이 읽는 책도 이처럼 손쉽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어른책은 어렵게 써야 하겠습니까. 왜 어른책은 갖가지 지식 자랑 낱말과 말투를 섞어야 하겠습니까. 왜 어른책은 얄궂거나 잘못된 말씨를 털어내거나 씻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하겠습니까. 왜 어린이책에서만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을 털어내고, 어른책에서는 이런 찌꺼기말을 안 털어내지요? 왜 어린이책 엮는 편집자와 어린이책 쓰는 작가는 ‘-의’와 ‘-적’이 되도록 깃들지 않도록 마음을 쏟으면서 어른책을 쓸 때에는 하나도 마음을 안 쏟지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살피는 눈길이 ‘얼마나 알맞춤하고 손쉬운 글을 쓰는가’로도 뻗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좀더 옳고 환한 이야기를 펼치도록 돌아보는 눈썰미가 ‘얼마나 더 많은 이웃하고 즐겁고 기쁘게 나눌 만큼 낮은자리 사람을 헤아리는 글이 되는가’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

 │→ 지구를 살리는 경제책

 │→ 지구를 지키는 경제책

 │→ 지구를 가꾸는 경제책

 │→ 지구를 돌보는 경제책

 └ …

 

 그런데 강수돌 님 책에서 한 가지가 아쉽니다. 다름아닌 책이름. 글쓴이와 출판사가 뜻을 모아서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이라고 붙였을 텐데요, 꼭 ‘救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을 넣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이야기책을 죽 헤아리면, 글쓴이 강수돌 님은, 우리 스스로 이 지구를 ‘살리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이 땅을 ‘지키는’ 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지구를 ‘가꾸는’ 길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소 지구를 ‘돌보는’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나서자고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 지구를 사랑하는 경제책

 ├ 지구를 껴안는 경제책

 ├ 지구를 좋아하는 경제책

 ├ 지구와 함께하는 경제책

 └ …

 

 지구를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꾸거나 돌보는 마음이 곧 ‘救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실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救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은 이 모든 말뜻을 담는다고 여기는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참말, ‘救하다’는 이 모든 말뜻을 담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모든 말이 골고루 쓰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 뜻도 저 뜻도 두루뭉술하게 감추게 하면서, 우리가 정작 하고픈 말을 못하게 덮어 버리지는 않을까요?

 

 지구를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꾸거나 돌보려고 하는 마음이니 “지구를 사랑하는” 경제책입니다. “지구를 껴안는” 경제책입니다. 참되게 “지구를 좋아하는” 경제학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구와 함께하는” 마음을 잇고픈 경제책입니다.

 

 ┌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x)

 └ 지구를 (어찌어찌하고 싶은) 경제책 (o)

 

 책이름 하나는 책에 담긴 줄거리를 간추려서 보여줍니다. 책이름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 터이나, 책이름 하나는 길이길이 두루두루 퍼져나가곤 합니다. 라다크사람 삶을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가 생명과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를 한 마디로 간추린다고 느끼게 하고, 《빛은 여기에》라는 한 마디로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강아지똥》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맺히고, 《들어라 양키들아》나 《뿌리》라는 책이름 앞에서는 매무새를 고치게 됩니다.

 

 ┌ 우애의 경제학

 │

 │→ 어깨동무 경제학

 │→ 함께 사는 경제학

 │→ 사이좋은 경제학

 └ …

 

 얼마 앞서 일본사람 가가와 도요히코 님 책이 새롭게 우리 말로 옮겨지면서 《우애의 경제학》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책은 1936년에 처음 나올 때 “Brotherhood Economics”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책을 펴낸 곳에서는 뜻과 생각을 모두어 “우애의 경제학”이라고 옮겼을 텐데, “형제나 동무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우애(友愛)’라는 이름을 붙여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좀더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느껴질 낱말을 골랐다면 한결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한테는 ‘사이좋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어깨동무’ 같은 좋은 낱말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 사이좋은 사람들과 같은 경제학이라면 “사랑스러운 경제학”이라든지 “사랑 담긴 경제학”이라든지 “사랑 나눔 경제학”이라고도 책이름을 붙여 볼 수도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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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강수돌 지음, 최영순 그림, 봄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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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책이름, #책, #강수돌, #가가와 도요히코,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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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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