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50년 6월 25일

태풍 뒤끝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하늘이 갰다 흐렸다 한다. 이따금씩 비를 뿌리기도 했다. 낮때쯤 하여 밭에 나갔더니 가겟집 주인 강군이 비에 젖은 머리칼을 문지르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는 나에게 뉴스를 전하여 주었다.

"선생님, 지금 시내에 들어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오늘 아침 38전선(全線)에 걸쳐서 이북군이 침공해 와서 지금 격전 중이랍니다. 그 때문에 시내에는 군인의 비상소집이 내렸고 거리가 잔뜩 긴장되어 있습니다."

나는 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마(魔)의 38선에서 항상 되풀이하는 충돌의 한 토막인지, 또는 강군이 전하는 바와 같이 대규모의 침공인지 알 수 없으나, 시내의 효상을 보고 온 강군의 허둥지둥하는 양으로 보아 사태는 비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이북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이른바 호소문을 보내온 직후이고, 그 글월을 가져오던 세 사람이 38선을 넘어서자 군 당국에 잡혀 문제를 일으킨 것을 상기하면, 그것은 저쪽에서 계획적으로 꾸민 일련의 연극일지도 모를 일이다. 평화적으로 조국을 통일하자고 호소하여도 듣지 않으니 부득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그 호소문에 담긴 내용은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니 다른 것은 모르거니와, 신문지상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이남의 정계 요인 아홉 사람을 제외하고 통일하자는 것이라니,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주)

이 대통령 이하 아홉 사람의 정치인에게 큰 오류가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를 바꾸어 생각한다면, 이남에서 통일을 제안하면서 김일성 수상 이하 이북의 정계 요인을 모두 제외하고 하자면 글쎄, 이북에선 이를 들을 법한 일인가? 이런 제안을 해 놓고 이북에서 듣지 않는다고 소위 북벌(北伐)을 한다면,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들 국민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북의 소위 조국통일 호소에 대한 이남의 처사도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넘어온 사람은 곧 되돌려 보내고, 그 제안의 불합리함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닐는지?

제안의 내용은 우물쭈물 비밀에 붙이고, 이른바 호소문을 가져온 사람을 잡아서 전향을 시키고 방송을 하고 하니, 아무리 억지의 제안을 가져왔대도 사자(使者)의 형식으로 월경해 온 사람들을 잡아서 족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남이며, 그들이 대한민국에 넘어와 보고 감격한 나머지 이북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는 발표는 좀 지나치게 어수룩한 수작이고, 국민은 또 어떠한 고문(拷問)을 썼기에 일껏 결심하고 넘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쉽사리 변절하게 하였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쌀값이 소두 한 말에 3천원의 고개를 바라보게 되고 민생고가 극도에 빠진 오늘, 이 닥쳐온 전란에 백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인가?

(*주) 북측 당국은 1950년 6월 19일 평화통일 사절단을 남측에 파견했다. 그들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된 9개 항의 통일 방안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 제4항에서 평화적 통일의 조건으로 9명의 남측 인사를 체포할 것을 요구했다. 북측이 제시한 남측 인사 9명은 이승만을 필두로 김성수, 이범석, 신성모, 채병덕, 백성욱, 조병옥, 윤치영, 신흥우 등이었다.

1950년 6월 26일

아침 일찍 정류장에 나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리는 손님이 여느 날처럼 많지 않다. 이윽고 생각해 보니, 어제의 전투 개시로 말미암아 버스가 징발된 듯싶다. 걸어서 학교에 나갔더니, 하룻밤 사이에 거리가 어쩐지 술렁술렁하다. 어제 저녁 무렵부터 밤사이에 멀리서 천둥하는 듯한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더니, 오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북군이 이미 38선을 넘어서 의정부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대포 소리라고 한다.

연구실에는 여느 날과 같이 강(姜), 김(金) 두 학생이 나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내가 기획하는 조그만 학술조사에 이 두 학생이 중심이 되어 협력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 연구실을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온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매우 성실한 천품이고 또 꾸준한 노력가이다.

강은 사상적으로 아무런 말썽이 없이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학생이고, 김은 국대안(國大案, 미군정의 국립대학 총폐합안)에 반대하였다고 하여 학도호국대 감찰부 학생들에게 좌익으로 지목을 받는다 하나, 이는 감찰부 학생들의 신경과민이고, 내가 보는 한 그는 순수한 리버럴리스트이다.

국대안으로 말하면 나 자신 이를 가장 싫어하므로 이렇게 생각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국대안을 반대한 학생이라 하여 이를 좌익으로 모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국대안 반대 투쟁을 좌익 측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 하여 그러한 성싶다.

우리가 보기엔 모든 기회를 노리는 좌익이 국대안에 대한 불평을 이용하고 이를 선동하였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순수한 기분에서 모순과 불합리의 권화(權化)인 당시의 국대안에 반대한 학생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아서 이를 두고두고 닦달하는 것은 국가적 견지로도 득책이 아닐 것이다. 이는 비단 국대안을 반대한 학생들만을 두고 할 말이 아니지만, 대체로 우익 측이 너무 편견을 고집하여 그 때문에 양심적인 중립분자들을 많이 좌익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없지 아니함은 우익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 하루 호외가 두 번이나 돌고, 신문은 큼직한 활자로 '괴뢰군의 38전선에 긍(亘)한 불법 남침'을 알리었다. 은은히 들려오는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괴뢰군에 대한 비방과 욕설로 가득 찬 지면을 대하니, 내일이나 모래쯤은 이 신문의 같은 지면이 괴뢰군에 대한 찬사와 아부로 가득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었다.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주변의 혼란, 흥분과는 딴판으로, 신문 보도는 자못 자신만만하게 '적의 전면적 패주'라느니, '국군의 일부 해주시에 돌입'이라느니, '동해안 전선에서 적의 2개 부대가 투항'이라느니 하는 낙관적 소식들을 전하여 주고 있다.

아직도 나이 스물이 될락말락한 강군이 신문을 보다 말고,

"적이 투항해 왔는지 국군이 투항해 갔는지 알 게 뭡니까?"

하고 그 애티 있는 입언저리에 쓴 웃음을 머금는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는 단순히 신문기사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국방부의 보도에 대한 불신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강군의 젊은 모습에서 민족의 '니힐'을 역력히 읽을 수 있어서 나는 사뭇 슬프기만 하였다. 하도 시달리고 들볶이어서 민족의 얼은 이미 젊음의 순진을 잃어버리고 모든 사물에 대한 비뚤어진 해석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새파란 젊은 나이에 지니지 않아도 좋을 많은 상념을 지니게 되었다.'라고 한 어느 폴란드 시인의 슬픈 노래가 다시 생각 키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보니 학교에서 느낀 이상으로 거리는 물 끓는 듯하였다. 한길에는 미아리고개를 향하여 질풍같이 달리는 군용차가 끊일 사이 없고 언제 풀려나왔는지 길가에는 소학교 아동들이 성을 쌓듯 둘러서서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아프게 박수로써 그 질주하는 군용차들을 환송하고 있다.

'전쟁은 기어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뒤이어, '5년 동안 민족의 넋을 가위 누르던 동족상잔이 마침내 닥치고야 말았구나.' 하는 순간 갑자기 길이 팽팽 돌고 눈앞이 깜깜하여졌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팩션입니다. 오늘 연재 분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했습니다.



#6`25#조국통일위원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