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대신 장만한 '아들' 같은 인화기
디지털카메라가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면서 사진관이 잘 될 줄 알았다. 사진기가 많아졌으니 당연히 인화하러 오는 사람들 또한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오히려 동네 사진관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천 부평구 십정동 동암역 남광장에서 '역전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최광남(55)ㆍ임경희(53) 부부의 얘기다. 최씨의 선친 최응식 선생(1993년 작고)께서 처음 사진관을 연 1964부터 지금까지 꼬박 45년 세상사를 필름에 담아오고 있다.
황해도가 고향인 고(故) 최응식 선생은 한국전쟁 와중에 홀로 인천에 정착했다. 그리고 당시 만석동 삼화제분 앞에 '부흥사진관'을 열었다. 그때 최광남씨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4년 뒤 제물포역 당시 화룡소주공장 앞으로 옮겼다가 도로가 개설되면서 무허가 건물에 살던 최응식 선생은 74년 이곳 동암역으로 와 역전사진관의 전신인 동암사진관을 다시 냈다.
최광남씨는 선친으로부터 사진을 배웠다. 최응식 선생은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안 좋아지자 카메라에서 손을 때고 아들한테 전적으로 맡겼다. 그리고 현재는 최씨의 둘째 딸이 최씨로부터 사진관일과 사진을 배우고 있다.
최씨는 "그땐 사진 티켓할인권을 판매하러 다니던 사진관 외무원(외판원)들이 많았어요. 사진관 영업해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지금처럼 홍보 방법이 많지 않을 때라 그 외무원들이 '이 사진관 가면 얼마 할인해주고 수건도 주고 설탕도 준다' 하면서 영업하러 다니곤 했는데 글쎄 그 사람들이 부풀려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 사진관에서 '왜 설탕 안 주냐'는 항의를 숱하게 받곤 했었다"라고 전했다.
군 입대 전까지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사진관을 맡았다. 아버지는 동암역에서 최씨는 주안 석바위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다. 동암역 북광장에 있던 사진관은 최씨가 결혼한 뒤 81년 현재 위치인 남광장으로 옮긴다. 이제 어느 정도 사진기술이 늘은 임경희씨는 당시만 해도 사진 찍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한다.
임씨는 "결혼해서 서울 살다 인천으로 왔는데 그때 우리 건물하고 양 옆 건물 제외하고 다 벌판이고 저 앞쪽(북광장)은 양계장이었어요. 그때 시어머니가 분가해서 열심히 살라며 일부러 남광장이 조성될 때 가게자리를 잡아주셨어요. 사진관에 딸린 방 한 칸이었는데 사진관이 좀처럼 잘 안돼서 남편은 일터로 나가고 저는 남편이 일러준 대로 촬영해놓으면 남편이 퇴근 후 수정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인화를 하던 때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마련한 돈 5000만원으로 최씨와 임씨는 큰맘 먹고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사진인화기를 장만했다. 당시 빌라 한 채 값이 5000만원이었다. 그 인화기는 20년이라는 손때가 묻었지만 지금도 선명한 화질을 자랑하며 부부의 '아들' 노릇을 하고 있다.
'마지막 필름'에 담긴 잊지 못할 사진 자라면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진기를 늘 옆에 두고 살아서일까? 이 부부의 세 자매는 모두 사진 전문가다. 그 중 큰딸은 대형 스튜디오 업체에서 일하다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고, 둘째는 현재 같이 일하고 있으며, 막내는 대학생이지만 틈나는 대로 가게에 들러 일을 봐준다.
임씨는 "막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반 아이들 증명사진을 다 찍어 와선 그걸 하나하나 정성들여 수정한 다음 직접 인화해서 애들한테 나눠줬어요. 막내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애들이 다 학교 다닐 때 소풍가거나 수학여행 가면 친구들 사진 찍는 게 다반사였어요"라고 들려줬다.
딸들의 이 같은 모습은 최씨한테서도 확인된다. 최씨 역시 학교 다닐 때 사진 찍어 나눠주는 게 일이었고, 그중 사진 값을 받은 적은 기억에 없다고 하니 그저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준 것 뿐이다. 훗날 자신의 아이들이 그럴 거라고는 최씨도 몰랐다고 한다.
역전사진관 부부가 필름에 수놓은 이들이 얼마나 될까? 백일 사진 찍어줬던 아이가 어느 덧 제 아이의 백일사진을 찍으러 역전사진관을 찾고 있다. 세상이 디지털 세상이다 해서 빨리빨리 변하는 게 최씨는 부담스럽지만, 오래 전 사진을 가져와 복원해달라는 사람들을 만나고, 어릴 때 사진 찍어줬던 이들을 다시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어줄 때 만나면서 이 일 하는 보람을 느낀다.
여권 사진이나 증명사진, 가족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더러 디지털카메라를 가져와 인화를 해가는 사람도 있다. 전에 최씨는 동네에 결혼이나 회갑연 등의 잔치가 있을 때마다 바빴다. 한손엔 병풍 들고, 어깨엔 카메라와 장식품 메고 그렇게 잔칫집을 돌며 십정동 사람들 집에 걸려있는 회갑연 기념사진,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모든 일들이 뷔페식당을 통해 이뤄지다 보니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정말 빨리 변해요. 이 일도 사업이니 그때그때 장비 구입하느라 정신없는데 디지털카메라 나오고 나선 변화속도가 너무 빨라서 쫒아가기도 바쁩니다. 하지만 역시 사진은 필름카메라에서 진정성이 나오게 돼있어요. 디지털카메라는 제한 없이 찍을 수 있으니까 촬영을 남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는 그럴 수 없지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거기에 사진의 매력이 있는 거예요. 제게 만일 가장 소중한 사진이 뭐라고 묻는 다면 전 '36방 필름카메라의 마지막 한 컷'이라고 지금도 얘기해요. 이제 딱 한 장 밖에 찍을 수 없으니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가능하면 아름다운 풍광, 가능하면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 장면, 이걸 담으려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가 편하다고 하지만 진정성을 맛볼 수 있는 것은 필름카메라, 그것도 그 마지막 한 컷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