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중종 임금이 과거에 최종 합격한 33인 중에 한사람인 김구에게 물었다. 술의 폐해는 무엇인가? 김구는 대답했다 "술의 폐해는 오래되었다....우리 조선의 여러 훌륭한 임금님들께서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셨다...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더욱 심해져,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흉년을 만나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도서출판 소나무)라는 조선시대의 왕과 젊은이들이 당시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국가개혁의 방안을 묻고 답한 고전 자료를 한글세대에 맞게 쉽게 번역한다는 것을 기본출발로 삼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한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마지막에는 단지 33명만이 최종합격자에 오른다. 그들은 더 이상 탈락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 33명의 등수를 결정짓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왕이 보는 앞에서 치르게 되는 전시의 마지막 관문, 책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대입 논술시험에 해당하는 시험이 바로 책문이다.
전시를 보는 까닭은 단순히 인재등용과 입신출세를 위한 통과의례만은 결코 아니었다. 왕은 당대의 고질병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전시에서 왕이 제시한 책문이란 문제는 다름 아닌, 나라가 당면해 있는 국가적 차원의 고민거리와 그것에 관한 해결방안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時務) 국가정책(策)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시무에 관한 책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기의 순간이 있고, 불안한 삶을 극복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는 법이다. 과연 그대가 왕이나 재상이라면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왕의 질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은 절박하게 물었고, 세상에 첫발을 딛는 젊은 인재들은 목숨을 걸고 정면으로 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책문의 주제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 군사, 교육, 풍속 등 나라살림에 관한 전 분야에 걸쳐있었다.
한 마디로 나라 살리기에 관한 왕의 절박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관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젊은 인재들의 용솟음치는 포부가 대책을 통해 마음껏 펼쳐진 무대가 전시의 책문이었다. 따라서 책문은 단지 인재 등용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비전이란 화두를 놓고, 왕과 젊은 인재들이 나눈 열정의 문답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명종노진 : "전하께서는 안락에 빠지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면서,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고자 힘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을 대궐의 뜰에 나오게 해서, 특별히 치란과 안위의 원인, 그리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어려운 점을 책문으로 내셨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복입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학문의 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정치의 길은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먼저 진리를 탐구하지 않고서는, 정당하게 사람을 쓰거나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 중종조광조 : "임금과 백성은 근본이 같으므로, 임금의 다스리는 도가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는 마음이 아니면 깃들어 있을 곳이 없고, 마음은 성실이 아니면 작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처럼 부지런하고 땅처럼 순응하는 덕을 지니고, 끊임없이 힘쓰고 계십니다. 다스리는 마음이 이미 정성스럽고, 다스림을 행하는 방법도 이미 바로 섰습니다. 그런데도 성균관에 오셔서 성인을 참배하는 예를 드리는 길에, 저희들에게 대책을 묻는 시험을 내셨습니다. 감히 보잘것없는 생각이나마 마음을 다해 귀하신 물음에 만 분의 일이라도 성의껏 답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 광해군조위한: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비록 기운의 변화에 달려있지만, 부흥하거나 쇠퇴하는 것은 정치의 득실에서 비롯됩니다. 이미 망한 나라를 되돌아보면서 앞날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까닭은, 모두 낡은 제도와 인습적인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에 맞게 바꿀 것은 바꾸고 계승할 것은 계승하며, 사회변화의 추세를 살펴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입니다. 궁벽한 바닷가 한쪽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에서 삼국시대까지, 나라가 분열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 중종김의정 : "자기 나라의 실정을 잘 알리는 방법은 말을 올바로 잘하는 데 있고, 자기 나라의 외교적인 방침을 전하는 데는 덕이 가장 중요합니다. 덕이 부족한데도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말이 바르지 않은데도 뜻을 잘 전하는 경우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근본이고, 말은 지엽적인 것입니다. 지엽적인 것이란 기능을 말하고, 근본이란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 세종 강희맹 : "지난 옛날을 두루 고찰해보았더니,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발단은 모두 어떻게 인재를 양성하고 가려서 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아래로 미천한 선비와 학문이 미숙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텅 비우고 널리 불러들여, 경전을 강론하면서 진리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얻으면, 큰 재목은 크게 이루어지고, 작은 재목은 작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인재를 양성하고, 인재를 분별하며, 인재를 쓰는 방법에 더 이상 남은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교화를 숭상해서 현명한 사람을 널리 불러 모으고, 마음을 밝게 해서 인재를 분별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 중종 권벌 :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붙잡으면 간직되고 놓으면 없어지며,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며 가는 곳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마다 마음은 붙잡고 놓는 것이 한결같지 않지만, 선과 악은 모두 여기서 나뉩니다.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마음을 보존할 수 있고, 끝에 가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을 간직하고 잃어버리는 것에 선악이 결부되어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그 시대적 한계를 온통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왕의 절박한 질문과 젊은 인재들의 답변을 읽어보면, 그들이 당시에 지녔던 시대정신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고, 또한 얼마나 구체적인 문제들이었나를 잘 알 수 있다.
왕의 질문들만 대략 읽어보아도, 그 당시의 실존적 위기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광해군),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명종),"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중종), "교육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명종),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세종), "정벌이냐 화친이냐"(선조)등등 모두가 사실 21세기의 지금 우리에게도 절박한 문제들이다. 과거란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형식성만 알고 있던 우리들로선, 이런 질문들이 실제로 과거시험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비록 결과적으로 나중에 조선사회가 패망의 길을 걸어갔지만, 각 시대마다 당대의 문제에 치열하게 대응하고자 했던 그들의 흔적을 어찌 한갓 공염불과 무능함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왕들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진정으로 당대를 함께 이끌어갈 정치적 파트너를 원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책의 지은이들인 조광조-성삼문-신숙주-강희맹-권벌 등의 면면을 살펴보기만 해도, 책문을 통해 왕이 얻고자 한 인재들이 어떤 인물이었지 잘 드러나고 있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는 조선시대의 왕과 젊은이들이 당시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국가개혁의 방안을 묻고 답한 고전 자료를 한글세대에 맞게 쉽게 번역한다는 것이 기본출발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절절한 시대상황과 그 시대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새로이 재미있게 재구성해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작업으로 확대되었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의 저자 김태완 선생은 1964년 경북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까지 봉화에서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퇴계선생의 일화를 들으며 성장한 것을 바탕으로 율곡선생의 <책문>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은 대학에서 꾸준히 강의해왔지만, 지금은 배운 것을 사회에 봉사할 방법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고 있다고 전한다. 한편으론 자연에 대한 천석고황(泉石膏肓-'샘과 돌이 고황에 들었다'라는 뜻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을 다스릴 수 없어, 자연으로 돌아가 주경야독할 궁리도 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책문과 고서들을 일일이 파헤치면서 과거의 문제를 현실로 옮겨놓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통해, 당시 책문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생생한 현실로 실감나게 되살아나게 되었다. 옮긴 책으로는 <중국철학우화>,<상수역학>, <도교>, <중국문장가열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