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창너머 가로등이 어슴푸레 방안을 비추고 있다. 대체 몇 시지? 윗집에서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를 쳐다 봤다. 야광색이 칠해진 시계 바늘이 2시를 가리킨다. 잠시 멍하니 누워있다가 뭘 하다 잠이 들었는지를 생각해 냈다. 다시 잠들지 않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걸쳐둔 겉옷을 다시 껴 입고 조끼도 입고, 텅빈 의자에 앉았다. 이불을 당겨 무릎을 덮었다.
다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 간다'를 펼쳤다. 이 단편의 원래 제목은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8년 2월에 나온 단편집은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2009년 1, 2월에 앞다투어 출간된 자그마치 여섯 권이나 되는 피츠제럴드 단편집은 모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소설이 이미 예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도, 한참 후에 나온 인기몰이 중인 영화가 소설 제목까지 바꾸어 버린 셈이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이라는 영어 이름을 달고 있다. '투모로우' 나 '다크 나이트' 와 같이 영어를 그대로 발음나는 대로 적어서 영화 이름을 붙이기에는 영어가 너무 길었던 것일까. 어쨌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긴 영화제목을 붙인 한 사람은 아주 유명한 한 작가의 소설 제목까지 바꾸어 버렸다.
이 책에 실려 있는 11편의 단편 중, 남아 있던 나머지 세 편을 마저 읽었다. 한 편을 읽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 편을 읽고. 시계는 새벽 3시, 4시를 지나고 있고 동이 틀려면 아직 멀었다. 400쪽이나 되는 두꺼운 단편집을 덮고는, 1940년 12월 21일 심장마비로 죽은 천재 작가를 생각했다. 화려했고 사치스러웠던 그의 삶을 상상했다가, 하늘이 준 글 쓰는 재능을 보석과 화려한 생활과 맞바꾸어 버린 안타까운 작가를 생각했다. 질투를 하기도 했다가. 20세기 초반 영문학과 지성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T.S. 엘리엇은 이 책의 작가인 피츠제럴드를 '문학적 천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이 문학적 천재는 어느 날 600달러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시계를 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낙타 엉덩이'라는 단편을 쓴다. 아침 7시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2시에 펜을 놓는다. 작품을 발표하고 피츠제럴드는 아마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시계를 샀을 것이다. 또한 이 천재 작가는 호사스러운 삶을 너무나 갈망한 나머지, 상상 속에서나마 가능한 모든 사치스러운 일들을 겪어보려고 한다. 혼자 상상하며 스스로 즐거워하고 만족해가면서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라는 단편을 쓴다. 그리고 한 유명한 비평가는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그전까지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에 나도 푹 빠져서 읽었다. '어쩌면 이런 상상을 할 수가 있단 말이지? 어떻게 이런 마지막 반전을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래,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니 알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어쩌면 정말로 세상 어딘가에는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예상밖의 반전과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자본을 간단히 무력화 시켜 버리는 마지막 힘까지. 정말 대단한 작가구나라는 생각을 글을 읽는 내내 했다. 돈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아했던 작가가 상상속에서나마 무한대의 사치를 누려보고자 글을 썼다는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긴 했지만.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같으니!"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너무 많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신의 섭리를 거역한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천국뿐이었다. 그곳에 가면 그 자신처럼, 이승의 삶을 제대로 쓰지 않고 낭비해버린 자들만 만나게 되리라-로 끝나는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도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스스로 뿌리친 유혹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나는 지옥에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 마지막 구절은 무척 마음에 든다.
'행복의 잔해'도 깔끔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화려한 삶을 즐겼던 작가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기도 한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이야기 하나가 제발 좀 써달라고 울부짖으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형태로 찾아왔다고 한다. 몇 년도 작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치스런 삶에서 잠시 떨어져나와, 역시나 화려한 삶에 푹 빠져 살았던 그의 아내 '젤다'와는 다른 조금은 헌신적인 아내와 조용히 살고 싶었던 마음이 이 글로 표현되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아내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사랑과 화려한 삶, 그리고 정신병과 알콜중독으로 물든 그들의 비참했던 나머지 삶, 그들의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소설 '앨라배마 송'으로 출간되어 2008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부부의 삶은 피츠제럴드의 소설만큼이나 화려했고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의 삶이 그의 소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결국 나락으로 추락해버렸다는 점이다.
이 천재 작가가 화려한 삶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을 해본다. 다이아몬드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싼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문학이 좋아 글을 썼다면, 글에 푹 빠져서 단편 한편 한편을 써나갔더라면, 영미 문학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을 해본다. 결국 할리우드로 넘어가 빚을 갚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대신, 그 동안 번 돈으로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세기 후반까지 살았더라면 어떤 대작들이 나왔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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