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경기도 양평군 해발 366m)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의외로 수도권에서 가까운데 위치한 산이었건만 그 이름도 생소하고 어디쯤에 있는 지도 잘 몰랐던 산.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있었지. 안치환이 불렀는데 이 산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싶어 산 이름의 유래를 먼저 찾아보았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산이어서 남한강에 비치는 풍경이 '마치 연당(蓮堂)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것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는데, 애매모호한 전설이 한 가지 더 보태진다.
고려시대의 한 왕비가 있었는데 첫 날밤에 그만 방귀를 뀌어서 쫒겨나게 되었다나? 왕궁에서 내쳐진 왕비를 유배 보낸 곳이 부용산이란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애매모호한 산 이름 까지 궁금증을 더하는 그곳은 양수리에 걸쳐진 양수교를 건너 바로 눈앞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데 있는 것을 몰랐구나 싶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곳을 지나쳐 오며 가며 눈길을 주었던가. 그 이름도 모른 채 말이다. 이름을 불러 주어야 비로소 내게로 와 이름을 얻는 건 꽃뿐만이 아니리라. 산 또한 그러하리.
양수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편에 공원이 보인다. 여름이면 남양주 세계야외축제가 열리곤 하던 '양서체육공원'이다. 그곳에 차를 주차하고 등산을 시작하면 그리 높지 않은 부용산을 가장 오래 걸을 수 있는 등산로(용담리 코스)에 닿는다. 친절하게 공원 입구에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산은 높지 않는데 길게 뻗은 산이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어야 하는 산이다. 높지 않은데 길게 뻗은 산이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나 내가 좋아하는 지형의 산이라 설레임으로 등산길에 오른다.
가는 길도 어쩌면 예쁜지. 팔당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긴 육지가 섬이 되기도 하고 마른 땅에 호수가 들어선 곳도 있었단다. 그렇게 해서 생긴 호수가 부용산 아래 아담하게 들어서 부용산 산자락을 고요히 비춘다. 산영(山影)이 드리운 호수를 들여다보면서 호수 위로 설치한 나무데크를 걷는 맛도 특별하다. 나무데크가 끝나는 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었는데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에 낙엽이 소복하다.
사람들의 내왕이 그만큼 없었다는 증거다. 오붓한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길이 끊어졌다. 산자락 사이로 앞마을 뒷마을을 연결하는 작은 도로가 나 있었던 거다. 도로를 건너 다시 시작된 산길도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소나무가 참 많다. 수종은 그리 다양하지 못한 듯싶은데 건강해 보이는 숲에 유난히 소나무 잣나무가 많고 참나무가 많이 섞여 있다.
별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산에서 몇 번인가 삼거리를 만났지만 이정표도 비교적 잘 되어 있고 산악회가 다녀갔는지 붉고 노란 리본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달려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낙엽 진 나무 가지 사이로 남한강이 들여다보인다.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이 오면 아마 저 남한강도 가려지리라.
실망은 이르다. 정상에 오르면 남한강이 한 눈에 들여다보이고 두물머리 역시 바로 눈앞인 듯 가깝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용산의 가장 큰 매력은 연당에(남한강 맑은 물)에 비춰지는 정상에서 두물머리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 일을 바라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완만한 산길을 걷고 또 걷는다.
봄이 왔을까, 싶어 숲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아직 이른 봄은 겨우 지난 겨울동안 두툼하게 옷을 입힌 씨눈만 부풀렸을 뿐이다. 아직 이른 봄을 만나고 싶은 성급함으로 나무에 귀를 대어본다. 수관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따라한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었는지, 진짜 나무 속 결을 따라 물이 움직이고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촉촉해진 대지에서 나무뿌리가 물을 끌어 올려 나무 가지 가지마다 적시고 있을 그 소리를 환청처럼 들었다.
햇살이 이렇게 따스한데 봄이 안 올 리 없다. 남한강 푸른 물이 저렇게 흘러가는데 봄이 안 올 리 없으니 나무 결을 따라 물도 흘러 겨우내 마른 나무 몸속을 구석구석 적시기도 하리라. 그렇게 봄은 오고 있을 것이다.
산모퉁이를 셀 수없이 돌고 삼거리를 만나서 다른 길과 헤어지며 얼마를 걸었을까? 조금씩 급경사다. 급경사라야 뽀죡한 바위도 없고 줄곧 흙길인데다 밧줄까지 잘 걸려 있으니 그걸 잡고 오르면 급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경사가 급해진 건 정상 근처다. 비로소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거의 5km 가까운 산길을 걸었는데 이제서야 등산객을 만나는 걸 보면 부용산이 잘 알려지지 않는 산이 확실한 것 같다.
정상에서 무리지어 내려오는 걸로 보아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밧줄 잡고 오르는 아이들을 보고 대단하다고 칭찬들을 하신다. 고개를 까닥, 인사를 대신하면서 아이들이 웃는다.
더 멀고 험한 산들도 많이 올랐지만 부용산처럼 비교적 쉬운 산도 산은 산인 것이다. 부용산도 산은 산이어서 정상 못 미쳐 경사도가 심한 오르막도 있고 주변에 옛 산성의 흔적을 보여주는 돌들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펑퍼짐한 부용산 정상에 웬 무덤들이 즐비하다. 명당자리라고 했다. 그래도 산 정상에 나란한 무덤들은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썩 유쾌한 풍경은 아니지만 전망 하나는 기가 막히다. 그래서 명당인가. 북쪽으로 우뚝 솟은 청계산이 보이고 양수교 건너 마주보이는 곳에 운길산도 보인다. 그 사이에 두물머리가 흐르는 모습이 눈 앞엔 듯 선연하다.
두물머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두면 남한강이 길게 뻗어 또 한편의 그림을 그려놓는다. 부용산의 히든카드가 거기 있었다. 부용산 정상에서 풍덩, 뛰어들면 바로 남한강 속으로 들어갈 것 같다. 이 시원한 전망을 보기 위해서라면 부용산을 오르는 많은 코스가 있다. 양수교를 건너 시작되는 용담리 코스로 부터 주변 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가 여섯 군데로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에 위치해 있다.
산은 그대로되 언제 찾아가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산을 만날 수 있는 게 산행의 매력이다. 부용산은 여름에 가면 좋을 것 같다. 흙산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이기도 하고 정상에서 만나게 될 남한강의 장대한 흐름은 가슴 속까지 시원함을 선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왕은 어쩌자고 왕비를 이런 곳에 보냈을까. 방귀 한번 뀌었다고 뱃속에 아이를 가진 왕비를 쫒아낸 왕은 얼마나 곧은 성품이었기에 그리 했을까. 아마도 그 왕은 이곳에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으리라. 저렇게 장대하게 흘러가는 남한강을 보았더라면 그리 속 좁은 마음은 품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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