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아 카페 만들었다. 임마 좀 들어와봐라!'
이미 며칠 전부터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번갈아 보내는 협박내지는 회유성 문자를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 내일 미루다가 이석주 선생님의 소식이 있다는 말에 서둘러 카페에 들어가 봤다.
"자식덜~ 촌놈덜이 무신놈의 카페를 다 맹글고."
우천초등학교 41회.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 있는 전형적인 시골학교다. 6학년 3반 이석주 담임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 철원교육청 교육장으로 퇴임을 하신단다.
"와~ 교육장님씩이나. 역시, 자랑스러운 우리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소식이 더 궁금해서 혹시나 하고 인터넷에 '이석주+선생님'을 검색해보니 전국에 이석주 선생님이 참 많으신 모양인데 선생님 소식은 접할 수가 없다.
이번엔 '이석주+교육장'으로, 보인다! 강원도교육청 블로그에 올려진 선생님의 소식이 사진과 함께 올라 있다. 기사를 보는 순간, 아! 콧날이 찡하다.
"그래, 지금도 여전하시구나. 그 화분."
교육장으로 계시면서 스승의 날에 관내 용정초등학교를 방문해서 '1일교사체험'을 한 뒤 아이들에게 꽃화분을 하나씩 나누어주셨다는 내용이다.
선생님은 우리 6학년3반 담임을 맡으셨던 그 때에도 교실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화분 하나씩을 우리들에게 배정해주셨다.
"이 꽃은 응기, 이 꽃은 영옥이, 이 놈은 철원이."
나는 그 때 고무나무 화분을 배정받았다. 두껍고 넓적한 녹색이파리가 황소엉덩이처럼 보기 좋게 반으로 나누어져있으며 줄기는 개구리뒷다리처럼 튼실한 그 고무나무는 마치 선생님 같았다.
그날부터 학교에 가면 그 고무나무에 물을 주고 만져주고 때 묻은 옷소매로 이파리를 닦아 주기도 하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자를 가지고 얼마나 컸는지 재보기도 하였는데 쑥쑥 잘도 자라났다.
고무나무 잎에서 나오는 진액성분이 고무원료라는 말에 나는 이파리를 조금 찢어보고 싶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내내 참았다. 결국 중학교에 진학한 뒤 학교에 있던 고무나무를 보고서 몰래 이파리를 찢어보았더니 정말로 끈적끈적한 진액이 묻어나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은 화단에 꽃도 잘 가꾸셨다. 봄여름에는 채송화, 제비꽃, 튜울립, 백합, 장미, 다알리아 등 우리 키보다 작거나 큰 꽃들이 교정을 울긋불긋 장식했고 가을이면 운동장에서 교실로 오르는 화단은 물론 계단이며 교무실 창가에도 온통 노오란 국화꽃이 부글부글 향기를 발산했다.
화단 가운데에는 커다란 돌멩이에 '어린이헌장'을 써놓으시고는(기억에 선생님은 붓글씨도 잘 쓰셨다) '너희들이 미래의 주인공'이라며 꿈을 길러주셨다.
모종삽을 들고 화단을 손질하면서 가끔 휘파람을 부셨는데 보통의 휘파람이 아니고 앞니 사이로 내는 휘파람이었다. 위 아래 앞니를 가지런히 맞붙이고 안에서 혀를 붙혀 내는 그 휘파람 소리가 하도 신기해서 우리 반 애들은 물론 다른 선생님들까지 따라 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마 그 휘파람은 선생님만의 특기였던 것 같다.
그러고는 못 뵈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스승의 날 무렵에 어찌어찌 수소문해서 편지 한 통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 그러셨구나", 화분 나눠주기를 아마 교직시절 내내 하고 계셨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로그의 기사를 읽어내려가다가 마우스를 내리자 선생님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아났다.
아니 저 주름살, 내가 선선하게 기억하고 있던 선생님의 얼굴은 어디로 갔나. 선생님만큼은 내 어릴 적 젊은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자연 그대로의 교실이었기에 선생님만큼은 파릇한 화초 잎처럼 세월도 비켜갈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선생님도 나이를 드신 것이다.
훤했던 이마에 검은 점티가 하나 둘 보였고 학생들이 가슴에 꽂아 주는 코사지를 받으며 수줍게 웃으시는 눈가와 입가에는 화전밭 고랑처럼 주름살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넓어보이던 콧구멍(에구 경망스럽습니다)도 좁아졌고 맘씨 좋은 아저씨처럼 두툼했던 입술도 얇아지셨다.
"그래 내가 참 무심했구나."
나는 선생님과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빠른 일곱 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나는 저학년 때부터 신체와 체력이 한 살 위의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해 힘을 쓰는 놀이에서 늘 소외되곤 했다. 덩치 큰 친구들이 발로 내찬 축구공이 얼마나 빠르고 무서웠던지 피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잘 보살펴주셨다.
이따금 선생님의 숙직 당번날이면 학교숙직실로 놀러오라고 하셔서 당시 시골에선 흔치 않았던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에 숙직실에 가곤 했었는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는 하였다. 아침에 잠을 깨면 쑥스러운 느낌에 별 인사도 못하고 집으로 내쳐 달려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의 '자연 가꾸기'는 학교 밑에 있던 밭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결명자를 수확하기 위하여 낫질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시골아이들에게 낫질은 요즘의 컴퓨터게임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낫질이 서툴렀던 나는 그만 낫으로 왼손 검지손가락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손가락에 피가 제법 흐르고 덜렁거리는 느낌까지 들어 속을 살펴보니 뼈가 보일정도였다. 하얀 뼈를 보자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선생님이 놀라서 달려오셨고 피가 흐르는 손을 내 머리위로 높이 치켜 올리셨다. 그러자 흐르던 피가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다행히 학교 가까운 곳에 보건소가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싸매어 계속 내 머리위로 잡아 올리신 채 보건소까지 함께 가셨다. 가는 동안 나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때는 그랬다. 손가락의 아픈 통증보다도 선생님을 불편하게 했다는 죄송함이 먼저였고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간다는 그 사실이 그저 수줍을 따름이었다.
보건소에서 몇 바늘을 꿰매는 동안 선생님이 오른 손을 꽉 쥐어 주셨다. 그리고 며칠 뒤 종례시간에 '철원이가 마취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꿰매는데 사내답게 잘 참더라'며 친구들 앞에 나를 으쓱하게 해주실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취 같은걸 하고 치료를 했나보다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도 아픈 걸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짧은 시간에 마취를 못 한 것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아마도 옆에 계신 선생님이 마취제 이었나보다.
아직도 왼손에는 세 겹의 선명한 바늘자국이 추억의 일기장처럼 손가락에 새겨져 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선생님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좋으면 공부도 잘 한다고 했다. 6학년 2학기가 되어 교육청에서 치르는 평가시험이 있었다. 아마 요즘의 학업성취도 일제고사쯤 되었나보다. 우리반이 교육청 관내 학교 중에서 월등하게 좋은 점수를 받았나보다. 당시 시험관리를 위해서 학교마다 시험감독 선생님을 서로 바꾸어서 진행을 하였는데 하필이면 우리 반에 배정된 시험감독이 다른 초등학교에 계셨던 나의 아버지였다.
교육청에서 이것을 문제 삼았다. 아들이 있는 반의 감독소홀로 우리 반이 좋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반만 재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 참, 배정을 교육청에서 해놓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처음으로 밤을 꼬박 새어 공부를 해보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재평가 시험은 치르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인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선생님에게 누가 될까 하는 심정에 참으로 심기가 축축했던 며칠이었다. 아마 그 때 공부한 것으로 시험을 봤다면 참으로 좋은 점수가 나왔을 것 같다.
그러던 나는 2학기말 무렵에 선생님과 헤어져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누나들이 자취를 하고 있던 원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도록 할 량으로 부모님은 졸업 전에 나를 원주로 전학시키려 하였다. 나는 '그럴 거면 학교를 아예 안가겠다'며 소위 등교거부시위(?)를 하였다. 5학년 때에도 기르던 '메리'(우리집 개이름)를 팔아치울 조짐이 보이자 학교를 안가고 '메리'와 함께 하루 종일 산속으로 피신(?)했다가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내려왔던 전력이 있었다. 부모님은 결국 나의 뜻을 거두어주셨고 나는 선생님과 함께 6학년 3반 졸업앨범에 실릴 수 있었다.
선생님께 편지를 한 통 쓰고 싶다.
선생님, 기억하시나요?
저 철원입니다. 그렇게도 선생님을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사이트 신규가입 때 비밀번호 분실시 암호란에는 '제일 기억나는 선생님?' 질문을 클릭해서 '이석주' 선생님의 이름으로 답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량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문안인사 못 드린 것도 죄송스러운데 퇴임식에 직접 찾아뵙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대신 우리 친구들 승곤이 태섭이 완란이 규철이 상길이 다섯명의 사절단(?)이 선생님을 뵙고 왔다고 합니다. 이래서 친구들이 고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카페를 둘러보니 어느 새 선생님을 뵙고 온 친구들이 사진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블로그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젊어 보이십니다. 33년 전 그 시절 그 모습이 오히려 옆에 있는 제자들보다 더욱 젊어 보이십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의 퇴임식을 보면서 갑자기 아버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용서하세요. 저는 참으로 아버님의 속을 많이도 썩인 자식이었습니다. 공부하라고 보낸 놈이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를 받자 아버님은 수원까지 오셔서 저의 손을 잡고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그때는 아버님을 야속하게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40년을 넘게 교직생활을 하시고도 평교사로 퇴임하신 것이 이 철없는 아들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덜컥 목이 메어옵니다. 그러고도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불량제자 큰 절 올리겠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선생님은 틀림없이 멋지게 제2의 인생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교단 밖에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꼭 오래 오래 건강하셔야 합니다.
저는 마침 요즘에, 훌륭한 교육재정전문가를 도와서 이 나라의 공교육이 바로 서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스승의 날 '1일교사체험'에서 말씀하신 교사의 권위를 우뚝 세우고 아이들의 꿈을 소중하게 가꿔주는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얼마 전에 넷째가 태어나 아이 넷을 두고 있는 저로서는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퇴임식을 앞두고 버르장머리 없이 전화 한 통으로 안부를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바쁘다는 어리석음으로 아직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다음에 선생님 댁으로 꼭 찾아뵙기로요. 그 때 선생님에게서 받았던 고무나무, 잘 생긴 고무나무 화분을 하나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그 때 가면 눈에 좋다는 결명자차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선생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