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실린 이봉렬 기자의
<환율 올라 좋겠다고? 외국생활 더 힘들어요>라는 기사를 읽었다. 맞다. 이런 경기불황에 외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선택을 했다. 이 글은 이런 숨 막히는 경기불황 속에 프리랜서(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실상은 무직^^)를 선택한 만 33세의 일본이민자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개서다. 물론 직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이민자나 유학생들에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지만, 이렇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는 정도로 읽어주길 바란다.
고환율 시대, 33세 일본 이민자의 선택 나는 지난해 12월, <오마이뉴스 일본지사> 생활을 접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원인은 물론 원화 약세, 엔고 때문이었다. 당시 내 월급 시스템은 한국 <오마이뉴스>의 일본지사 파견사원이라는 형태였기 때문에 본사로부터 일정 금액을 한국통장으로 입금 받아 시티은행을 통해 달러로 환전, 일본에서 엔화로 인출하는 방식이었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보통 10분의 1로 잡으면 얼추 맞는다. 가령 2백만원을 받는다면 이쪽에서는 20만엔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이 환율 시스템이 미쳐 버렸다. 작년 상반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통 1000원선/100엔 정도였던 것이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널뛰기하듯 올라 12월에는 1450원/100엔이 되어 버렸다. 즉, 순식간에 월급이 30%나 깎인 셈이다. 지금은 1600원/100엔 선까지 육박했다. 만약 한국 원화를 그대로 수령했었다면 수수료 등을 감안할 때 40% 정도의 삭감이다.
난 여전히 밤새워가며 일을 했는데, 순식간에 이렇게 깎여버린 것이다. 내 생활과 직결된 문제이다 보니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당시 경제수장이었던 강만수 장관의 환율정책 및 시장개입에 대해 수많은 비판과 화풀이를 쏟아냈다. 그렇지만 이게 금방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작년 10월에 만난 유명한 경제 애널리스트 모리나가 타쿠로를 비롯한 각종 금융기관의 분석가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FX(Foreign Exchange) 시장의 딜러들이 "한국경제는 특히 외환구조가 취약해서 원 약세 현상이 아마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또 외환딜러 M씨도 개인적인 전망임을 전제로 "심하면 올해(2008년) 말까지 1600원/100엔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 있다.
그러나 설마 했다. 그 당시에는 조금 오르긴 했었지만 1200원대(100엔)이었다. 2개월 만에 20% 정도의 통화가치가 더 하락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연말은 아니었지만 2009년 2월 20일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1600원 선에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1500원 선을 근근이 방어하고 있지만 조만간 이 선도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일본업계에 나도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언젠가 1600원을 찍는다면 엔화를 모으자고. 그리고 한국 통장에 원화로 입금되는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받는 원고료나 방송 코디료, 번역료 등의 부수입은 손대지 않기로 했다.
한국 직장 버리고 일본 '백수'가 되다 이런 상태에서 올 1월, 백수생활이 시작됐다. 큰 애가 유치원에 들어갔으니 유치원비와 방세 월 12만엔(200만원), 각종 보험료와 식비 등 한 달 생활비를 합하면 약 20만엔이다. 한국 돈은 몇 년이 되더라도 환율이 회복될 때까지 건드리지 않을 것이므로 일본 현지에서 한 달에 20만엔만 벌면 된다. 참, 시청에서 월 아동수당으로 1만5천엔(큰 아이 5천엔, 작은 아이 1만엔)이 나오니 19만엔 정도다.
프리랜서 카메라맨으로 전향하면서 일본의 유명 예능 리포터 나시모토 마사루의 일을 받기로 했다. 나시모토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촬영 일거리를 주었다. 사와지리 에리카나 미야자와 리에 등 연예인이 주로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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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와 리에, 임신 6개월 2월말 임신 사실을 홈페이지에 올려 세간의 주목을 끈 톱스타 미야자와 리에. 28일 도쿄 시부야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정보를 입수해 직접 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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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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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거리로 하루 3만엔(약 45만원) 정도 벌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이므로 월 12만엔을 버는 꼴이다. 다른 데에서 7~8만엔 정도의 수입을 얻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파친코 가게 아르바이트와 신주쿠 가부키쵸의 일본인 선배가 운영하는 원샷바의 일일점장이다. 처자식을 둔 33세의 기혼남성이, 그것도 저널리스트라고 명함을 들고 다니는 인간이, 파친코 알바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시급 1300엔(약 2만2천원)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본 역시 글로벌 기업 도요타, 도시바, 소니 등이 적자계상을 하는 등 경기불황의 여파에 고통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비정규사원들의 해고 및 감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구인광고 역시 변함없다. 아니 오히려 잡지시장의 한파에도 타운워크, 도모 등 구인잡지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을 정도다.
이런 아르바이트 구인광고 중에서 A급 수당을 자랑하는 것이 파친코였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두 번 나가는 거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자는 생각에 옆 동네 파친코 가게에 취직했다. 보통 파친코 가게는 2교대로 근무하는데, 오후 3시에 출근하는 쪽을 선택하면 하루에 1만3천엔도 벌 수 있었다. 지난 1월 중순부터 출근해 두 번 월급을 받았는데, 한 달 평균 6만엔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가부키쵸 원샷바의 경우 정해진 시급 없이 하루 가게 매상의 40%를 받는 조건으로 일했다. 가게 문을 닫으면 안 되니까 일본인 선배가 쉬는 날 대신 봐주는 것이었는데, 내가 보는 날의 평균 매상이 3만엔 정도이고, 한 달에 3~4회 정도 나가니 나에게는 4만엔 정도가 떨어지는 셈이다.
카메라맨, 파친코 알바, 원샷바 일일점장까지 가장으로서 기본적인 책임, 즉 생활비를 어느 정도 확보하다 보니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주일에 딱 3일만 밖에 나가서 일하니까,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만날 자는 모습만 보였던 내가 아이들과 온종일 부대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근검절약을 위해 술과 담배도 끊어버렸다. 물론, 모임이 있으면 시내에 나가기도 하지만 3000엔 내에 해결하기 위해 2차는 가족들 핑계를 대고 무조건 사양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은 도무지 회복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경기불황이라고 한탄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닐 테다. 특히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더더욱 불안한 게 사실이다. 내 주위의 한국 유학생들 중에는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말자. 오히려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하며 포지티브하게 생활하는 게 어떨까. 담배만 끊더라도 하루 300엔이 굳는다. 습관적으로 편의점에서 사지 말고 근처 대형슈퍼의 할인정보를 알아내서 한 푼이라도 싼 날에 한꺼번에 대량구입하면 20% 이상 절약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일본에 있다는 걸 축복으로 생각하고, 프라이드 같은 건 잠시 접어둔 채 엔화를 모아댄다면 송금하느라 뼈 빠지는 부모님께 효도도 되고 자연스럽게 애국하는 게 되니까.
애국이라는 말만 들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지만, 외국에서 생활하면 미우나 고우나 조국이 그립고 또 언제나 찾아가고 싶어진다. 이 글을 쓰면서도 줄곧 한국이 생각나서 마음이 심란하다. 아무튼 힘내고 또 건강해라,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