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직원 노동조합이 벌인 215일 간의 파업을 아시는지. 2006년 4월 6일에 시작되어 대학 노조 사상 최장(最長) 파업이라는 '기록'을 세운 뒤 그해 11월 6일 막을 내린 한국외대 노조의 전면파업. 벌써 2년도 더 된 이 파업이 최근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언론의 '토끼몰이'식 보도가 빚어낸 노조의 백기투항
한국외대 노조와 외대 본부 간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06년 3월 1일 박철 현 한국외대 총장이 새롭게 취임한 직후. 그달 3일부터 노사 양측은 단체교섭에 들어갔다. 그런데 3차 교섭을 예정하고서 각자의 단체교섭안을 검토하고 있던 상황에서, 3월 14일 돌연 학교가 노조 측에 단체협약 파기를 통보했다. 나아가 학교는 조합원 48명에 대해 '조합원의 가입범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 탈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노조가 4월 6일부터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 외대 측은 오히려 탈퇴 요구에 불응한 22명중 3명에 대해 5월 12일 징계를 내렸다. 쟁위행위 기간에는 징계 및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당시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불법(학교 측 주장으로는) 파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징계했던 것이다. 이후 외대 측은 추가로 4명에 대한 징계조치를 내렸다. 한국외대 노조의 길고도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노조는 학교 측이 성실하게 교섭에 응할 것과 노조원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이어나갔지만, 학교 본부는 전혀 양보할 줄을 몰랐다. 징계를 철회하기는커녕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하며 파업 중인 조합원들에게 일체의 임금 지급을 거부하였다. 파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10월 30일에는 외대 교수 200여 명이 노조에 무조건 업무 복귀할 것을 '최후통첩'하였다. 파업의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이 조금도 타협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노조는 요구사항들을 하나도 관철시키지 못한 채 11월 6일 노조 간부들의 부분파업으로 파업형태를 전환했다.
당시 노사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은 데에는 외대 본부 측의 경직된 태도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도 노조에 불리한 여론이 학내와 사회를 지배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우선 학생 자치의 핵심에 서 있는 총학생회가 노조 파업에 반대하다 못해 적대적인 태도까지 보였다. 한국외대 총학생회는 파업 초기부터 수 차례 노조 사무실에 임의로 들어가 노조 선전물을 강제철거하는 행위를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2006년 5월 17일에는 파업철회 서명운동을, 9월 14일에는 노조를 상대로 한 학습권 침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위해 서명운동을 벌였다. 학내 학생들의 일반적 여론도 노조 파업에 부정적이었다.
각종 언론매체들은 이러한 반(反)노조적 여론을 부채질했다. 당시 언론들의 보도를 모아보면 언론들이 노조 파업에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열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 직원 파업44일째… 학사 마비(문화일보 2006년 5월 19일자)
外大 직원노조 파업 143일째 "개강이 코앞인데…"(동아일보 2006년 8월 26일자)
한국외대 150일째 파업…학생들 분통(국민일보 2006년 9월 1일자)
7개월이 넘는 장기파업에도 아무 소득 없이 손을 든 한국외국어대 노조 파업사태는 우리 노사관계에 또 하나의 큰 교훈을 남겼다. 상식을 벗어난 비타협적 노동활동은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없어 결국 실패한다는 점, 그리고 툭하면 파업부터 벌이는 잘못된 노사관계를 바로 잡는 데는 무노동 무임금 등 사용자의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의 필요성을 보여준 것이다.(서울경제 2006년 11월 8일자 [사설] 한국외대 노조 장기파업 실패의 교훈)
이와 같은 언론의 '후방지원'이 학교 측의 강경대응 및 총학생회의 파업방해와 맞물려 노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2년 3개월, 세월은 흘렀건만... 변하지 않은 편파와 왜곡
그렇게 한국외대 교직원노조의 파업이 끝나고 2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한국외대 파업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질 때쯤이 되자, 별안간 대법원이 한국외대 노조 파업에 새로운 조명을 비춰주었다. 2009년 2월 23일 대법원이 한국외대가 노조원을 쟁의기간 중에 징계한 것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노조의 정당한 쟁의기간 중에는 어떠한 사유로도 노조원에게 징계나 부서 이동 같은 인사 조치를 할 수 없다'는 당시의 단체협약은 적법하며, 학교 측이 이를 어기고 조합원을 징계한 것은 협약에 위배되어 무효라는 것이 대법원 논지의 핵심. 한국외대 측이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무시한 데 대해 대법원이 따끔한 일침을 놓은 셈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한국외대 노조의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였으며, 노조가 아직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2년 전의 '반노조 여론몰이'를 다시 시작하려는 이가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아무리 단체협약이라도 '어떠한 사유로도 인사 조치할 수 없다'는 조항이 적법(適法)하고 유효(有效)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불법행위를 하자며 맺은 계약이 무효이듯 누가 봐도 노조에 의해 악용(惡用)될 게 뻔한 단체협약은 효력을 인정해선 안 된다는 법조계 지적도 있다. 만일 법원 노조가 '어떠한 경우에도 징계하지 말라'는 단체협약을 요구한다면 대법원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중략) 대학 노조 사상 최장의 파업으로 학교는 쓰레기장이 됐고 책 대출·반납이 중단된 도서관은 기능이 마비됐다. 노조원들은 사무실을 돌며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직원을 폭행했고 대학 곳곳에 총장을 인신공격하는 글을 써 붙여 벌금형을 받았다. 노조원들은 파업 도중 "파업 피곤증이 생겼다"며 일주일씩 휴가를 다녀왔다. 대학 행정이 마비돼 기업의 취업설명회도 열리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노조 사무실 문에 못질을 하고 노조를 상대로 위자료를 달라는 소송을 냈겠는가.(조선일보 2009년 2월 25일자 [사설] 대학 무법(無法)천지 만든 노조와의 단체협약 꼭 지켜야 하나 중)
조선일보의 기사 및 사설 내용만 보면 문제의 단체협약 조항(제111조: "노조의 정당한 쟁의기간 중에는 어떠한 사유로도 인사 조치할 수 없다")이 노조의 모든 불법행위를 용인하는 터무니없는 조항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노조의 정당한 쟁의기간 중' 이라는 문구의 중요성을 완전히 간과함으로써 나타난 효과이다.
문제의 조항은 노조원들에게 완전한 '면책특권'을 주는 조항이 아니다. 최소한 정당한 파업이 이루어지는 중에는 노조원들의 지위를 보호하여 노조의 단체행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다는 취지의 조항일 따름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노조가 파업하는 경우 회사 측이 각종 사유로 노조 간부들을 징계함으로써 노조를 무력화시키려 한 사례가 빈번했음을 돌이켜보면 그 취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즉 문제의 조항은 단체협약에 충분히 들어갈 만한 상식적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들을 일체 무시하고서 조선일보는 마치 대법원이 엉터리 단체협약을 판결에 적용한 것처럼 사안을 왜곡하고 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외대 노조의 장기파업으로 대학행정사무가 마비되고 학생들이 불편을 겪은 사실만을 부각시키면서, 그 원인을 전부 노조가 억지를 부린 탓으로 돌리고 있다. 당시 학교 측이 단체교섭 진행 상황에서 기존 단체협약 무효를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 사실이나, 학교 측이 성실한 교섭을 회피하면서 노조에 대해 일방적으로 파업 포기를 요구하는 등 강경 일변도로 나간 사실은 조선일보의 사설 내용에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학교 측의 일방적이고 강압적 태도가 노조 파업을 장기화시킨 주요 원인일 수 있음을 조선일보는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노조갈등 막고자 한다면 노동자 입장 대변 늘어야
언론이 사회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막강하다. 언론이 어떠한 논조로 보도를 하고 어떻게 여론을 유도해가는가에 따라 각종 사안들의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 2006년 한국외대 교직원노조의 장기파업은 언론의 이러한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만약 다수 언론들이 당시 한국외대의 일방적인 태도를 더 문제삼았다면 한국외대 파업의 결말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올바르고 균형 잡힌 논조를 가진 언론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사회 언론 지형은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이다. 최소한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사회에 균형 잡힌 언론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번 조선일보 사설은 이러한 우리 사회 언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법원 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한국외대 노조에 대한(나아가 심지어 대법원에 대해서까지) 비난부터 퍼붇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우리 사회 언론들에 부탁건대, 제발 파업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보도만을 일삼는 태도를 삼가주기 바란다. 나아가 파업의 원인을 노동조합의 탓으로만 돌리는 논조도 재고해주기를 바란다. 진정 한국외대 장기파업과 같은 사례를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언론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