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싸움은 다양하다. 이유도 다양하고, 목적도 다양하다. 감정, 금전, 애정, 신의, 우정, 대의. 드라마에서 따귀 맞는 장면은 싸움의 최고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속의 전형이고, 국회에서 나랏님들이 멱살잡이에 쌍욕을 하며 싸우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옆 동네 시장 통 국밥집에서 술 먹고 싸우는 김 씨와 박 씨의 싸움도 프로들의 싸움과 기술차이만 있다 뿐이지 마찬가지니 싸움을 어떤 기준에 의해 분류하기는 힘들겠다
싸움의 경중을 따지자면 그냥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입으로 싸우거나, 고상하게 온라인 오프라인의 매체를 통해 글로 싸우거나, 학계에 논문을 발표해 몇 백 년을 지켜온 아성에 도전하는 싸움도 있겠고, 돈을 목표로 한 기업들 간의 싸움이나, 은행털이와 보안업체 또는 경찰 간의 싸움도 영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싸움이라 익숙하다.
이런 싸움들은 나와는 거리가 있다. 한 발 물러서서 감상이 가능하다. 입술이 파래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내 몸에 실감나는 것은 나의 싸움이다.
가까울수록 싸움의 빈도도 높다. 동의하시는가. 학창시절에 거의 싸움이 없었지만 몇 번 싸운 경우에도 매일 밥을 같이 먹는 옆의 짝과 싸우거나 짝과 싸운 이와 싸우거나, 그 싸움을 끼어든 아이와 싸우거나가 다였다.
살아오면서 몇 년 전까지는 가장 많이 싸운 대상이 어머니였고, 주먹다툼까지 해가며 격렬하게 싸웠던 경험은 어린 시절 두 살 터울의 동생과 있었다. 그 모든 싸움의 빈도와 횟수를 다한 것의 몇 배를 싸운 대상은 불과 3년 전 결혼한 나의 아내다.
천사 같은 김태희와 우락부락 설경구가 부부로 나와서 온갖 액션을 보여주고, 김태희의 3단 변신(?)을 볼 수 있었던 '싸움'이 최근이라면, 고 최진실과 박중훈이 주연했던 '마누라죽이기'도 있고, 이십여 년 전의 마이클 더글라스와 캐서린 터너가 주연했던 '장미의 전쟁'이 부부 간의 극적인 싸움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영화들이라 떠오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 가장 친하면서 가까워야 할 대상이 그렇게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 싸움의 대상인가. 어려서 부모님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면(보통 싸움의 발단부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절정에서 내용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왜들 저러실까.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될 일인데 하며 혀를 끌끌 차고, 소리가 높아져서 주변 집들에라도 들릴라 치면 내가 나서서 말려볼까 하다가 몇 번을 참았던 기억이 있다.
왜 그러실까'가 지금은 '왜 그랬을까?' 하고 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 아마 누구라도 싸우고 나면 항상 후회를 한다.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자신이 많이 밀렸다고 생각되면 좀 더 강하게 반박하지 못한 것에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 결국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상대방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과 후회다. 10초만, 아니 5초만 숨을 고르면 넘길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짧은 대거리. 그게 싸움이다.
싸움의 발생지점은 정확하지 않다. 둘이 마주 앉아 복기(?)를 해봐도 서로의 주장이 항상 대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제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기분이 좋다가도 몇 번의 일상적인 대화 일부에 또는 그 끝에 약간의 일상적이지 못한 단어나 문장 혹은 강조되거나 뒤틀린 억양, 이를 오해한 과민 반응과 그에 대한 상대의 반응, 무난하다면 싸움이 되지 않고 넘어가거나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형상인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으로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99.9프로 싸움으로 간다. 물론, 피할 길을 찾으면 싸움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 억양자체가 높고 깊은데다가 항상 불만을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는 어느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며 60년동안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단다. (30년을 함께 하신 따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유를 나름 분석해 보니 할아버지의 항상 일방적인 승리.
할머니가 시비를 걸어와도(다른 이가 볼 때 싸움이 날 상황으로 짐작될 때) 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하거나 또는 아예 반박조차 하지 않으며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시는 놀라운 경지의 기술을 보여주시는 것.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을 가끔 본 적이 있다. 보통 '바보'라고 불리는 종류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밖에서는 불의에 가차 없이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분이다. 보통 밖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시비조차 걸지 않는다. 오직 집에 와서 큰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자, 그럼 해답이 나온 것인가. 아니다. 위의 할아버지 사례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싸움피하기가 안 된다. 나만해도 전술을 수 십 가지를 이해하지만 실전에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다. 몸에 익어있는 경륜이 아니면 실전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는 힘들다. 나와 상대하는 나의 아내는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한다.(부부싸움에서 사용하는 '벼랑 끝 전술'은 무엇일까. 각 부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부부간 사용하지 말아야 할 전술인데, 어쩌면 이에 대한 내 첫 대응이 너무나도 심드렁하여 상용화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약발이 없으니 이제 더 이상 창조적인 전술도 없고, 요즈음은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 이기고 지는 이는 없다. 그것조차도 악을 쓰며 경기하는 세 살짜리 아들이 방해꾼으로 등장해 쉽지 않으니 신혼초의 싸움에 비하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사실이다. 빨리 경계를 풀고 이불속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네 탓이니 지적하지 않아도 약간의 '분위기'만 풍겨도 발화가 되어 진화가 쉽사리 되지 않는 불과 같은 싸움이 최근 경향인데, 아무래도 우리 가계 불황에 따른 경제적인 압박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이혼사례를 봐도 경제적인 이유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반증한다고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