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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블로그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지금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의 직업이 영화 잡지 기자란 사실은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그의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책을 구입한 궁극적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블로그의 글을 통해 심심치 않게 엿볼 수 있었던 그의 삶의 태도. 어렴풋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반가웠고 안도감이 들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내가 하는 고민이 단순한 철없음의 발로는 아니었구나. 반갑다. 흥분된다.

물론 나와 허지웅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간의 교감이 가능한 단 둘이라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보면 허지웅의 말은 상식선의 이야기일 수 있다. 또한 어딘가에 이미 이러한 삶의 방식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지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하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견지하는 삶의 태도가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일 수 있지만 원체 지금의 세상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움켜쥐고 지켜나가는 일 자체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종의 상대 평가(?)다. 그리고 이것은 허지웅 식 삶의 태도를 가진 모두에 해당된다.

또 하나. 직업이 글쟁이인 까닭일까, 허지웅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뭉뚱그려져 있는 생각의 조각들과 사고의 체계를 명확한 언어로 구체화하고 정돈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무언가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세상이 의문스러워 막연한 불안과 고민을 안고 젊은 날을 사는 이라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봄직 하다. 허지웅의 언어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

다른 하나. 그의 글 자체가 이미 '선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소설이 아니라 명백한 허지웅 자신의 이야기다.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의 글자 하나하나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자기 고백이 되고, 나아가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살겠다'는 선언이 되어버린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을 스스로 택한 셈이다. 그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이 사회 속에서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까우며, 쉽고 편하기보다는 어렵고 고단할 것이라고 볼 때, 이 '선언'은 곧 '용기'가 된다.

책은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작은 사람들의 나라>,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큰 사람들의 나라>, 영화 평론을 모아놓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물론 허지웅의 정치 포지션이 나와 90% 일치하고 영화 이야기도 재미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작은 사람들의 나라>가 가장 끌린다. 허지웅의 치열함이 재미있고 공감되고 때로는 대단해 보인다. 그것은 곧 나의 치열함에 관한 돌아봄이자 반성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어른스러움'에 대한 반감, 조직 지향적이지 못한 성향, 이성과 감성 모두가 조금은 지나치게 풍부한 것, 친구와 인간관계에 대한 지론, 엄마에 대한 특별한 애틋함, 그리고 자동차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까지, 허지웅의 이야기는 마치 내가 쓴 것 마냥 나와 엇비슷하게 닮아 있다. 어쩌면 허지웅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삶의 태도와 가치관과 감성은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그것들이 조금 더 깊어지고 정립된 형태일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보다 네 살이 많으니 얼추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허지웅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미덕은, 그의 강한 자의식과 치열한 삶의 태도가 아집이나 독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책의 맺음말이 인상 깊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는 방황하던 삶을 다잡아준 바이블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두에게는 그들 나름의 합리와 그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당신들에게 내 방식을 따르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할 생각도 없다. 그렇게 살아야 옳은 것인데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니 고추 잡고 반성하라며 당위에 기댄 글쓰기를 남발할 생각은 더욱 더 없다. 다만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사회가 정의하는 '평균적인 삶'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고민 없이 당연하다 여기고 좇아가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만약 허지웅에게서 이러한 균형감각과 삶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시야를 발견할 수 없었다면 조금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면서 나는, 글의 끝에 책의 머리말을 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자 동시에 허지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들어 있는 부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른스러움', 그리고 '삶의 관성'. 그 틈바구니 속에서 허지웅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스스로 꽤나 평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딱히 가난하게 살지 않았어요. 등골이 휘는 고생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살아 계시고요. 보통이라는 말을 둘러싼 보통 공기마저 견딜 수 없을 만큼 보통인, 언뜻 노태우의 보통 사람적 인생이란 말이죠. 보통이고 일반이고 평균인 내가 좋아요. 대중이라는 이름의 틈바구니 속에 있을 때가 자궁마냥 제일 편하고 안락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면 뭐야 이건 자꾸 움츠러듭니다. 그래요 이게 문제예요. 도무지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괴리감. 거리를 가득 메운 자가용들을 좀 보시라고요. 우와 저 돈이 전부 어디서 나왔을까. 아마도 대당 천만 원씩은 하지 않나요. 태어나면서 들고 나온 걸까. 다들 로또라도 당첨된 걸까. 기름 값은 뭘로 충당하는 거지. 나는 딱히 백수로 시간을 채워본 일도 없고 미친 듯이 생계를 일구어왔는데 도무지 차나 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주위에 물어봤더니 다른 사람들 주머니 사정도 대개 그렇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빚을 내어서라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위대한 삶의 관성이지요.
미안하지만 전 싫습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경제동물로 살아서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놓고 뼈 빠지게 부양하며 빚 갚다가 조금 살 만해지면 불륜을 저지르거나 암 걸려 뒈지는 삶의 한심함이란 그런 관성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나는 대답해줬습니다.

물론 나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해요. 내가 뭘 알겠어요. 그냥 그렇게 빤하게 살다가 골로 가기 싫다는 거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평균적인 삶이라는 허상을 좇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기는 습관이나 저기 저 거대한 우주의 시크릿,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 따위 몰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합니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거지요. 산속에 들어가서 풀뿌리 캐 먹고 살자는 게 아니고요, 그저 소박하게 남들 다 하는 거 꼭 다 할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살자는 겁니다.

이런 결론에 닿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아마도 20대 전부를 통틀어 이 고민을 푸는 데 쓴 것 같네요. 선택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부채 위에 아슬아슬 쌓아 올린 세상의 빤한 삶으로 어서 들어오시라, 손짓만 했을 뿐이거든요.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20대로 살아 버틴 기록입니다. 시작부터 어리석고 반복적으로 어리석고 꾸준하게도 어리석었던 그 10년 동안 나는 때때로 즐겁고 대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고생기는 아니죠.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고생을 한 사람도 아니고 이 책을 '고생 올림픽'으로 채울 생각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표류기라고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내게는 해외를 체류하며 쌓은 뽀얀 기억도, 상위 5퍼센트가 될 수 있는 성공의 키워드를 알려줄 노하우도, 인생을 7막 7장으로 나누어 내 삶에는 쉼표도 마침표도 있다 없다 떠들 자신감도 없습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에게 좀 더 고생하고 불비할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버티어내다 꽤나 가까스로 삶의 방향성을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을 뿐입니다. 읽다 보면 아마도,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당신의 삶을 조금은 더 아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군요.

허지웅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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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머리말은 이미 출판사에서 공개한 내용이라 실어도 무방할 듯 하네요



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수다(2009)


태그:#허지웅, #대한민국표류기, #20대, #삶, #어른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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