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학년 초가 되면 초등학교 교실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초등교육 모습을 보면 해마다 담임이 바뀌게 되어 있고, 해마다 교사가 담임하는 교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2월에 담임 발표가 나면 2월말에 교실 정리를 끝낼 수가 있는데, 담임 발표가 늦어지면 3월 2일 시업식을 하고 나서, 전에 맡았던 반에서 새로 맡은 반으로 짐을 옮겨야 합니다. 초등교사들은 이를 두고 '민족 대이동'이라고도 합니다. 옮긴 짐을 풀어서 제자리에 놓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당연히 학년 초가 어수선해서 수업이 제대로 시작될 리가 없지요.
집을 옮길 때와 마찬가지로, 이사를 하게 되면 새로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작년에는 잘 지냈는데 새 학년이 되면 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바로 이때 학부모들이 교사에게 물어보는 얘기가 있습니다.
"선생님, 교실에 뭐 필요한 거 없어요?"담임교사가 교실에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만 하면 언제든지 갖다 주겠다는 이 말은, 학년 초에 학부모가 아이를 맡긴 담임에게 '나는 이만큼 교실에 협조할 마음이 있다', 또는 '무엇이든 그저 교사가 시키면 다 하겠다'는 충성을 서약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담임교사의 자리에서 보면 물건을 부탁할 일이 없는 요즘에도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런 말이 학부모와 담임 사이에 오고 가기 시작한 역사는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초임 시절만 해도 새 학년이 되면 주전자, 양동이, 먼지털이, 빗자루, 쓰레받기, 쓰레기통, 비누곽, 거울 같이 교실에서 쓰는 비품은 모두 학부모들에게 부탁을 해서 마련했습니다. 심지어 교사 책상보와 방석은 물론이고, 커튼까지도 학부모들이 새로 해서 달아주고 또 더러워지면 빨아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새 학년이 되면 각 교실은 학부모들이 주전자, 양동이, 쓰레기통, 화분 따위를 들고 오가느라 북적거렸지요.
일부 교사들은 교실에 새로 갖출 품목을 써 주면서 학부모들에게 미리 요구하기도 했지만, 주로 새로 뽑힌 반장 엄마를 위주로 구성된 어머니회 임원들이 나서서 '알아서' 교실을 새 물건으로 새롭게 바꾸어 주었기도 했습니다. 닦아서 쓰면 될 물건들도 다 버리고 새로 사고, 멀쩡한 커튼도 떼고 새로 달기도 했습니다.
민망하게도 제가 자리를 뜬 사이 교사 책걸상에 학부모 취향의 분홍색 레이스가 화려한 책상보와 방석까지 새로 마련해서 놓기도 했습니다. 한때 학부모가 어떤 물건을 어느 만큼 채워주느냐로 교사의 능력을 평가할 때도 있었습니다. 학부모들 사이에 경쟁이 붙기도 했고요.
사정이 이러니 반장이 되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고,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지요. 문제가 터지자, 학교에서는 교실에 필요한 물건은 학부모에게 요구하지 못하게 하고 학교 예산으로 모두 마련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휴지 하나라도 학부모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된지 한참 되었는데 최근에도 여전히 학부모들한테 교실에 필요한 것 없냐는 말을 많이 듣곤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교실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학교에서 마련해 주고 있으니 학부모님들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하고 답합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습니다.
교실에 필요한 청소도구를 비롯한 학습 교구는 물론이고, 아이들 학습에 필요한 학습준비물비까지 예산에 책정해서 모두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 우리 반 같은 경우는 아이들이 공부시간에 쓰는 모든 것을 다 사서 주었습니다. 미술 활동에 필요한 준비물과 음악 시간에 필요한 악기는 물론이고 알림장, 일기장, 풀, 자, 가위, 연필, 지우개, 셀로판 테이프까지 모두 교실에 사서 마련해 두고 썼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우리 반 아이들이 집에서 사 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 둘레를 보면 여전히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사오게 하는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소도구는 없어졌지만, 미술시간에 필요한 도화지를 한 장 한 장 사오게 하고, 심지어 아이들이 쓰는 휴지까지 가져오라고 하는 일도 봅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교사가 학교에 요구하면 학교에서 사 주는 것들입니다. 교사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고 있거나 학교에 요구하기 귀찮아서 아이들에게 그냥 '쉽게' 사 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사들, 제가 보기에 제 둘레엔 아직 많습니다. 이런 교사들이 바로 '불성실한' 교사이고, 같은 교사인 제가 보기에도 '나쁜' 교사입니다.
이럴 때 학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부분 학부모들은 불만이 있어도 교사가 사오라고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사서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괜히 딴죽 걸었다가 우리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하면서요. 그런데 이런 학부모 생각이 아직도 도화지 한 장, 휴지까지 사오라고 하는 '나쁜' 교사들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이럴 때 바로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학교에 따지고 요구해야 합니다. 분명히 교육청에서는 학습준비물비를 1인당 최대 2만 원까지 확보하라고 했고, 학교 예산에 분명 학습준비물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학교 예산을 세울 때 관리자 쪽에서는 아이들에게 돌아갈 학습준비물비를 최소로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교사들이 학습준비물비를 최대로 할 수 있게 예산을 요구하고, 교사들이 못하면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학부모들이 요구해야 합니다.
만약에 학습준비물비가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사오게 하면 예산에 확보된 학습준비물비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한지를 따져야 합니다. 그동안 경험으로 학교 관리자들이 알아서 어린이들 학습활동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게 필요한 비품과 교구와 학습준비물들을 알아서 확보해 주는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교사들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또 요구해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교사가 해주지 못한다면 그 다음 차례는 학부모들이 따지고 요구해서 얻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예산은 관리자 개인돈이 아니라 국민들이 낸 세금이거든요.
할 일도 많은데 내가 왜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어라든가, 힘들어서 그냥 놔둬야겠다든가, 왜 다른 학교에서는 준비물을 다 사주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사 주지 않느냐 불평만 하고 있다든가, 학교운영위원회와 학부모대표들은 뭐하는 거냐면서 다들 다른 사람 탓만 하게 된다면 날마다 아침에 도화지 한 장에, 휴지까지 들려 학교에 보내는 일은 계속됩니다.
도화지와 휴지 그깟것 얼마나 된다고 그냥 보내지 '쪼잔하게' 따지느냐고요???? 덧붙이는 글 | 저는 학습 준비물은 물론이고, 학교교육에 필요한 점심 급식비, 우유값, 현장 체험학습비, 수련회비도 모두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