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요즘 새벽 5시면 모두 기상이다.
가족 모두가 대체로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의외다.
새해부터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학 졸업을 앞둔 딸 운이가 취업을 위해 영어 학원을 다니기 때문이다.
새벽반이라 아침 6시 반에 수업이 있어 6시 전에 집을 나선다. 학원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원을 다녀온 후 아침 식사를 하곤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잤다.
그런데 운이가 2월 초부터 취업이 되어 학원에 갔다가 바로 근무지로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을 챙겨주러 아내도 5시면 일어난다.
정성으로 차린 아침이지만 언제나 시간에 쫓겨 제대로 먹지 못한다.
대학 1학년 아들도 방학 중 모 경호 업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 하루는 쉬고 하루는 24시간 근무를 한다. 그 때문에 도시락을 2개나 싸다보니 아내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덩달아 나도 깨고 보롱이(바둑이)도 일어난다.
나는 잠자리에 늦게 드는 편이지만 가끔 한밤중에 일어나 거실과 아이들 방을 돌아본다.
딸 운이는 자기 방 정리도 깔끔하고 잠자리도 반듯하다. 그러나 성격이 정 반대인 아들은 늘 잠자리를 고쳐 봐주어야 한다. 불은 켜두고 책상은 어지럽고 컴퓨터도 끄지 않는 것은 물론, 몸부림이 심해서 몸 따로 이불 따로 이다. 또 잠잘 때는 업어가도 모르니, 몇 달 후면 군대를 가야하는데 제 엄마의 걱정거리다.
그저께도 새벽 3시쯤 잠을 깼다.
역시 아들 방은 환하다. 불도 끄고 잠자리도 정리하고 이곳저곳을 살펴 본 뒤에 책과 지난 신문을 번갈아 보다가 시계를 보니 4시 반 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관에 나가보니 벌써 신문이 배달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새삼 감탄했다.
신문을 읽다보니 어느덧 5시, 아내가 일어났다.
"어제는 당신이 좋아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다가 자던데, 참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그것은 내가 가장 즐겨보는 모 방송 프로이다. 평소 밤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던 나를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이상하게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초저녁부터 잠이 많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운이가 집을 나섰다.
그동안은 혼자서 다녔지만, 강호순 살인사건과 잇따른 부녀자 납치 강도사건이 알려지면서 밤길이 불안해지자 아내가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처럼 일찍 일어난 내가 바래다줬다.
이른 새벽의 컴컴한 골목에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아침운동을 하는 부부도 보이고 가로등 아래 슈퍼 할아버지는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방금 버스가 지나가 버렸다.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시커먼 물체가 보인다. 한 남자가 먼저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으로 건너간 운이가 나를 보며 춥다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대답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왕이면 버스 타는 것도 보고 들어가려고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의 저 남자가 혹시 자기를 의심해서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나는 일부러 길을 걸어 저 멀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버스가 왔다. 운이가 버스 타는 것을 보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오면서도 자꾸만 그 남자가 나를 오해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오는데, 이 새벽에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어떤 아가씨가 앞에 가고 있었다.
아가씨가 나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빨리 하다가 이내 멈췄다가를 반복하더니 아예 저만큼 뒤처져서 천천히 걸어왔다.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 했다.
'이 길은 우리 아파트로 가는 길인데…'
앞서가던 내가 혹시나 하여 상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아가씨는 이쪽을 쳐다보다가 아파트 정문 입구 쪽으로 올라갔다.
'우리 아파트 사람이 아닌가?'
나는 상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왔다.
그런데 방금 그 아가씨가 저 멀리 아파트 정문 쪽으로 돌아서 들어오고 있었다.
괜히 씁쓸하였다.
오늘도 운이를 바래다주러 6시가 채 안된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와 지름길인 상가로 가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교복을 단정히 입은 여학생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왔다. 같은 아파트의 고3 학생인 듯한데, 아침 0교시 수업 때문에 일찍 가는 모양이었다.
'어라? 혼자잖아…'
운이도 겸연쩍었는지 나에게 '들어가세요'를 눈짓으로 한다. 나는 즉시 알았다 하며 한발 물러섰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둘만 타고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이렇게 일찍 나왔는데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가 뭣해서 운동 삼아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뒤따라 버스정류장으로 천천히 가봤다.
아니나 다를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운이가 '아빠~' 하면서 들어가라고 손사래를 마구마구 친다. 역시 지난번처럼 알았다며 천천히 아랫길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새 버스가 왔고, 운이가 탄 뒤 그 버스가 휙 지나가자 그 여학생이 혼자 남아있었다.
아마 노선이 다른 버스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 큰 딸을 바래다주는 팔불출 아버지로 비춰질까봐 멋쩍었다.
괜히 두 팔을 휙휙 돌리며 운동을 하는 것처럼 냅다 뛰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부엌에서 아들 도시락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낮이 많이 길어졌네. 내일부턴 운이 바래다주지 않아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