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그룹 클릭비로 활약했던 가수 김상혁이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음주운전을 하고 뺑소니 사고를 낸 김상혁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혐의를 부인했었다. 결국 그 발언 때문에 팬들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는 했지만 ○○는 아니다"라는, 이른바 '김상혁 어록'까지 등장해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
이와 비슷한 일이 교육계에서 벌어졌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는 지난 11일 '2011학년도 대입전형 기본사항 수립을 위한 세미나'에서 2011학년도 대입전형 기본원칙과 방향이 담긴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개정안에는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3불 정책(고교등급제·본고사·기여입학제) 가운데 2불(고교등급제와 본고사)에 대한 제한을 없애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2011년 이후 대학입시부터 본고사를 부활시키고, 고교등급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대교협은 2불 폐지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논술 등 필답고사'는 결코 '본고사 부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고사라고 하면 그것이 대입전형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지표로 활용되어야 하지만, 자신들이 말한 '다양한 형태의 논술 등 필답고사'는 학교생활기록부나 수능 성적과 함께 여러 지표 중에 하나로 적절하게 활용될 뿐이니 결코 본고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대교협은 그것이 100% 반영이냐 아니냐를 놓고 본고사를 정의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이다. 본고사의 정의는 그렇게 내려져서는 안 된다. 본고사는 '공교육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를 출제하여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고 결국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게 하는 시험'을 의미한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공교육이 결코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논술시험과 필답고사, 그게 본고사인 것이다.
공교육이 결코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논술시험과 필답고사
공교육에서 소화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말로 보편적인 고교교육과정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과거 본고사 시절의 출제 문항 등을 살펴보면 그 난이도가 터무니없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고사뿐만이 아니라 요즘 대학에서 실시되고 있는 각종 논술시험의 난이도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전 정부에서 단답형이나 선다형 문제, 풀이과정을 요구하는 수학·과학 문제, 영어지문 등의 출제를 금지하는 이른바 '논술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고, 그것이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지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학교생활기록부와 수능 성적과 더불어 다양한 지표 중에 하나로 활용되는 형태의 논술이나 필답고사. 대교협에서 본고사가 아니라고 정의 내린 이 '미래 지향적' 시험은 이미 과거에 한 차례 시행된 바 있다. 바로 94년 본고사 부활이 그것이다.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94년 처음 수능 시험이 도입되었을 때, 본고사도 함께 부활했었다. 그런데 부활한 본고사는 겨우 2년 남짓 시행되다가 폐지됐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전국이 학원과 과외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대교협의 말마따나 학교생활기록부와 수능 성적이 모두 함께 전형에 활용되었는데도 말이다.
고교등급제 문제 역시 대교협은 고교등급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교선택제', '학업성취도 평가', '고교정보공시제'에 의거하여 대학별로 고교종합평가를 실시할 수 있고, 이것을 통해 고교별로 어떤 시스템과 교육과정을 갖고 있는지 고교특성을 반영하겠다는 것이지 결코 고교등급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교 간의 학력 격차'를 인정하고 이를 대입전형에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고교등급제는 아닌데, 사실은 고교등급제가 맞습니다" 이 말인 셈이다.
고교등급제의 정의 역시 대교협은 잘못 내리고 있다. 고교등급제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고등학교마다 수준이 다름을 인정하고 등급을 정해 그 정도를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제도"다.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대입전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는 형태의 제도, 이른바 '연좌제'를 내포하고 있는 고교등급제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고교등급제 문제는 본질적으로 고교평준화 해체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고교입시가 사라지고 고교평준화가 시행되면서 학생들은 거주지로 나누어진 학군에 따라 '추첨제'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A라는 학생이 B라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거기에는 A라는 학생의 의지나 실력은 반영되지 않는다. 학생에게는 학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지역에 따라 '선지원 후추첨제'를 도입한 곳도 있지만 어쨌거나 추첨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이다.
필답고사는 실시하는데 본고사는 아니다?
'고교 간의 학력 격차를 인정하자'는 말이 100% 틀린 말은 아니다. 강남 8학군 학교의 전교 1등과 지방 농어촌 학교의 전교 1등이 같은 실력일 수 없다는 주장도 수긍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교에 다녀서 '억울한' 특목고 학생이나 강남 8학군 학교 학생 등을 위한 보완책은 이미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널리 활용되고 있다.
가령 대입 전체 선발 인원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수시모집의 경우 사교육의 혜택을 받아 유리한 '그들만의 리그'로 변모한지 오래다. 고려대의 경우 작년 수시모집에서 90%를 반영하는 학교생활기록부보다 10%를 반영하는 '비교과 영역'이 더 중요하다는 게 밝혀진 바 있다. 정시모집은 또 어떤가? 내신 실질 반영비율을 턱없이 낮춰 이 또한 수능성적이 절대적인 반영지표가 되지 않았는가?
김상혁 어록대로 말을 옮겨 보자면, 결국 "필답고사는 실시하는데 본고사는 아니다", "고교특성은 반영하는데 고교등급제는 아니다"로 볼 수 있다. 써놓고 보니 정말 우습다. 눈 가리고 아웅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현 정권 들어 대학입시 전권을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이양 받은 대교협의 의기양양함이 정도를 넘어선 듯 보인다.
본고사 부활과 고교등급제 실시, 이 두 문제의 본질은 '대학 이기주의'에 있다. 지난 11일 있었던 세미나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우린 잘하는 애들로만 추려 뽑겠습니다"라고 대놓고 얘기하는 대교협의 극심한 대학 이기주의의 결정체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대학이 공부 잘하는 학생 뽑겠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학은 이윤추구가 1차적 목표인 사기업이 아니다. 대학에는 학문을 책임지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교육을 담당하는 지성의 전당으로서 갖춰야 할 품격과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런 것들 모두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그럼 '대학(大學)'이라는 이름을 간판에서 당장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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