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KBS 2TV <무한지대Q>에서 출연제의가 들어왔었다. '맛객이 간다' 라는 코너에서 맛집 탐방을 하자는 내용이다. 촬영할 요리의 주제는 '국수'. 벚꽃이 구름처럼 만개한 계절이었으니, 아마도 나른한 봄철에 입맛 한번 돋구어 보자는 게 기획의도였던 듯하다. 수소문 끝에 두 집을 선정하였다.
한집은 내가 선택한 집으로 촬영할 메뉴는 열무국수였다. 또 한집은 프로그램 작가가 인터넷 구석구석 뒤져서 선택한 오양식당이었다. 그 집은 충남 보령 오천항에 있었다. 어떤 집인가 궁금도 하여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주력상품은 비빔국수였다.
대접에 담긴 일반적인 비빔국수와 달리 큰 접시에 담겨진 게 특이했다. 내용물은 국수와 상추, 생채가 전부였다. 별 특별할 것 없는 비빔국수지만, 초장과 참깨가 어지럽게 뿌려져있어 눈에 확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미각이 동하기는커녕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원인은 초장에 있다. 초장은 유랑자가 극히 싫어하는 양념 중에 하나이다.
어떠한 식재라도 산미와 감미 두가지 맛으로 정리를 해 버리는 게 초장이다. 특히, 녹색채소위에 뿌려진 초장은 그 싸늘함이 더해져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다. 그래, 초장 뿌려진 돋나물은 항상 불만이다. 그런데 파란 상추위에 초장범벅이라니. 내 음식타입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헌데, 이집 웃긴다. 아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 벌어졌다. 작가가 촬영섭외 전화를 넣자 일언지하 거부해버린 것이다. 어서 오라고 통사정해도 시원찮을 판에 말이다. 물러설 작가도 아니다. 여러 차례 청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카드를 쓸 수밖에….
음료 한 박스를 들고서 PD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맞아준다. 그렇다고 촬영을 허락한 건 아니다. 겨우 반승낙을 얻어내기까지는, 30여 분의 시간을 더 쓴 다음이었다.
하긴, 멀리서 찾아온 객에게 무작정 자신의 고집만 내세울 수만도 없지 싶다. 그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지방의 인정이다. 우리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무작정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유랑자가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새에 PD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촬영 아닌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이쯤 되니 아주머니도 협조 아닌 협조를 해주었다. 그렇게 수 시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보고 받은 느낌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간판 없이 시작한 식당, 곧 소문난 맛집으로
어쩌면 촬영하는 시간은 이 집의 비빔국수에 홀리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언 컨데, 그대가 나였어도 별수 없었으리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병원에 가서 미각검진이라도 받아보길 권한다. 비빔국수에 들어가는 면부터 남다르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뽑아서 쓰는데 새벽 일찍 아저씨가 반죽해놓은 것이다. 그 때문일까? 보드라운 촉감과 쫄깃한 식감이 그만이다. 면의 탄력을 놓이기 위해 전분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반죽에 들어가는 노고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다. 면이 식감을 좌우한다면 맛은 양념의 몫이다.
먹어본 바, 단지 새콤달콤하기만 하지 않고 감칠맛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첫맛에 반하지는 않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당긴다. 정말 좋은 음식은 뒤로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데 이집의 비빔국수가 딱 그렇다. 여기에도 나름의 정성과 비법이 스며있다. 비법이라고 해보았자 고추장, 된장을 손수 담가 사용한다는 것 말고는 없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성'이 비법인 셈이다. 맘만 먹는다면 누구나 낼 수 있는 비법이다. 하지만 정성을 돈, 시간과 맞바꾼 요즘의 외식산업 풍토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장사는 누가 보든 안보든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아주머니의 철학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 건 정성을 다해 요리를 하기 때문일 터. 겉절이 하나만 해도 소량씩 무쳐내기 때문에 생동감이 넘친다. 바닷물로 씻은 노란 배추가 빨간 양념과 어우러진 자태를 보고 있자면 체통 없이 침이 꼴딱 넘어가고 만다.
한국인의 기질 상, 정성은 곧 인심이기도 하다. 이 집 역시 예외가 아니다. 비빔국수에 나가는 국물대신 바지락칼국수가 나간다. 작은 국물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칼국수 한 그릇 분량에 가깝다. 비빔국수만 해도 적지 않은 양인데 시원한 바지락칼국수까지 곁들여지다니. 세상에 이런 미친 식당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지 양만 많은 게 아니다. 인근 바다에서 캔 싱싱한 바지락과 북어로 우려 낸 국물은 잘한다고 소문난 칼국수店 뺨칠 정도이다. 여기에 갓 무친 겉절이까지 더해지고 나면, 세상의 진미 별미가 별거냐 싶다.
시계바늘이 12시도 못되어 손님들 발길이 이어지더니, 금세 1층과 2층의 자리가 만석이 된다. 한적한 동네인데 어디서 이 사람들이 다 왔을까 싶을 정도이다.
오양식당은 간판 없는 식당으로 시작했었다. 욕심 없이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밥값이나 벌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손맛에 정성까지 가미 된 비빔국수는, 점차 입소문이 나 멀리 외지에서도 찾아왔다. 외지인들에게 간판 없는 식당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 간판 좀 달라는 성화에 현재는 간판을 달긴 했지만, 국수 맛은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장사는 누가 보든 안보든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