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한미 통상 협의(3월 11~12일) 다음날인 13일 외교통상부에 협의의 주요 내용을 물었다. 답변의 시작은 '이번 협의에서 한미FTA와 관련한 논의는 없다'였다. 이미경 의원실 관계자의 이야기다.
이번 협의에서 'FTA 관련 논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부와 외교통상부의 발언은 유독 두드러졌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의 또다른 전초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이번 '협의'에서 한미FTA 관련 논의가 없었을까?
미국측 관심사항은 언제나 한줄?
협의 내용이 궁금했다. "2009년도 제1차 '한·미 통상 협의' 개최결과"라는 외교통상부의 13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미국 측 의제에 대한 설명은 간략했다. 딱 1문장이었다.
"미측은 의약품, 화장품, TBT(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지재권 보호 강화 등 분야의 미측 관심사항을 제기하였습니다."
10일자 보도자료에서 밝힌 미국 측 의제에 대한 설명은 어떠했을까?
"미측은 의약품, SPS(위생 및 식물위생조치), TBT(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등 분야의 미측 관심사항을 의제로 제기할 예정입니다."
두 자료를 종합해보면 화장품, 지재권 분야에 대해서도 미국 측이 문제를 제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미측 의제에 대한 협상의 대강은 알 수 없다. 숨어있는 의제의 또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등'에 해당하는 또다른 의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번 협의에 대해 우리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 취임 이후의 양국 통상당국간 첫 협의라고 했다. 새로운 통상정책의 첫 협의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협의는 "정기적으로 갖는 국장급 협의"이기도 하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지난 11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미FTA 재협상) 이 얘기가 (협의의) 주요 메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라는 질문에 이번 협의의 의미를 '정기적 국장급 협의' 정도로 평가했다. 중요한 의제를 다루는 협상은 아닐 것이라는 뉘앙스다.
그래서일까? 보도자료를 통해 밝혀지는 협의의 내용도 대단히 간략하기만 하다. 협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두 보도자료는 모두 1페이지였다. 어찌됐든 협의의 구체적 내용은 추후 국회에 대한 보고를 통해, 그도 아니면 미국 협상단의 미국 의회 보고자료 등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참고로 이번 협의와 관련하여 3월 17일 현재까지 국회 외통위에 보고된 자료는 물론 보고계획조차 잡혀있지 않다.) 3월말 혹은 4월에 있을 임시국회에의 보고내용을 기대해 본다.
한미FTA의 2009년판 선결조건?
이번 제1차 한미통상협의를 전후해서 한미FTA와 관련 있는 한미간 통상현안, 즉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에 대한 여러 방법이 제시됐다. 먼저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의 말이다. 황 의원은 지난 12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오바마 정부가 재협상 또는 추가협상을 요구하지 않을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안할 것으로 저는 봅니다"라며 그 근거로 '최근 미측 주요 정책 건의서, 미국 내 인사와의 교감 등'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의 해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FTA하고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자동차 문제 푸는 것은 별도로 푸는, 그런 방법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이 문제하고 FTA하고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는 않고 (중략) FTA는 FTA이고, 쇠고기는 쇠고기다. 이렇게 분리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고."
간략히 말해 'FTA와 별도로' 처리하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자동차'는 한미FTA의 주요 성과로 정부에 의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는 FTA의 선결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국회 외통위 한나라당 간사인 황 의원은 '별도 처리'를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그럴 경우 한미FTA의 재협상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한미FTA '협정문'의 개정만 아니라면 '재협상(추가협상)'이 아닌 걸까? 용어에 몰두하는 것은 정부나 외교통상부만의 것이 아닌 듯 싶다.
낯설지 않은 '별도 처리'
한미FTA와 관련하여 '별도 처리'는 전혀 낯설지 않다. 정부는 스크린 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약값 재조정,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등 4대 선결조건과 관련하여 "FTA와 별도지만 우리가 먼저 풀겠다"고 했다.(4대 선결조건의 수용과정은 2006년 2월 9일 발표된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보고서 '한미 경제관계: FTA를 위한 협력, 마찰, 전망'에 자세히 실려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정부는 '쇠고기 협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별개'라고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6월 특별기자회견에서 쇠고기 개방이 한미FTA의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을 사실상 인정했었다.
한미FTA 재협상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한미FTA 협상 타결 후 이루어진 법률검토회의(2007.5.29.~6.6)에 대해 '미국의 신통상정책에 의거한 재협상 요구와는 별개의 것(2007.5.28 청와대 정례브리핑)'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2차례의 추가협의 이후 한미FTA의 내용은 수정됐다. '별도처리', '별개처리'는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황 의원은 한미관계에서의 '협상력 증대'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지난 5일 "G20 정상회의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한미FTA 문제가 빠질 수 없다"며 "이 대통령이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한미FTA 비준을 강력히 추진할 힘을 줘야 한다"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자동차, 쇠고기 분야에 대한 문제 제기는 후보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제 한미FTA 재개정은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의 통상정책의제다. 지난 3월 2일 발표된 미 무역대표부(USTR)의 <2009 무역정책 아젠다 및 2008 연례보고서(2009 TRADE POLICY AGENDA AND 2008 ANNUAL REPORT)>에서 한미FTA의 진전을 위한 벤치마크(기준)은 대통령의 통상정책의제(The President''s Trade Policy Agenda) 중 하나였다.
주요 의제의 해결 없이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한미FTA를 미 의회에 제출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황 의원이 이야기하는 4월 한미정상회담 전에 한미FTA '비준을 강력히 추진할 힘'은 과연 무엇일까? 바야흐로 자동차 분야나 쇠고기 분야가 이른바 '2009년판 선결조건'으로 대두되고 있는 건 아닐까?
'산이 높은' 한미FTA, '돌아갈 방법'도 제시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또다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황진하 의원보다 더욱 구체적인 아이디어다.
"FTA에 대한 미국의 수정의지가 확고한 이상, 우리는 비공개 추가협상을 통해 양국의 이견을 조정해야 한다".
지난 12일 민주당 박상천 의원의 말이다. 그는 시기와 협상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추가협상의 시기는 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내정자가 취임한 이후가 적당하며, 최대한 조용히 진행시켜야 한다."
'한미FTA 재협상은 없다'를 줄기차게 외치는 정부와 외교통상부 입장으로선 대단히 힘이 될 수도 있는 '야당' 의원의 말이다. '2009년판 선결조건'의 협상방법으로 대단히 유력한 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협상력 강화방안'은 다른 것 같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고, 현재는 국제전략문제연구(CSIS)의 고문이자 존스 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 의회가 어떤 방식으로 행정부의 협상력을 높여왔는지에 대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외교정책이 초당적 기반 위에 수립되었을 때, 행정부는 법률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종종 의회와 모의했다. 이러한 모의를 통해 미국 외교정책의 목표를 진전시켰고, 행정부가 가진 옵션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행정부의 협상력을 향상시켰다. 베트남 전쟁 이후의 시대에는, 외교정책과 관련된 특정한 로비에 의해 선호되는 특정한 목표들을 행정부에 부과할 목적, 또는 행정부가 가진 행동의 자유를 제한할 목적으로 입법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해졌다.(<미국의 마지막 기회(Second Chance:Three Presidents and the Criseis of American Superpower)>, 111면)"
중요한 대외협상에 있어 행정부와 의회의 협력이 필요함을 새삼 알려주는 말이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는 협상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입법이라는 방법까지도 동원한다는 것이다. 한미FTA에서도 이와 같은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협력은 주효했다.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미 민주당의 '신통상정책(A New Policy for America, 2007.5.10.)'으로 인해 가서명된 한미FTA 역시 재협상(추가협상)을 했었다.
'별도 처리'방안을 제시했던 황진하 의원 역시 이와 같은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주도권을 직접 경험했던 것 같다.
"쇠고기 협상 때 미국이 재협상 얘기를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주권국끼리 합의한 것은 마음대로 깨지 못한다.(2008.11.3.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
'100만의 촛불'이라는 국민적 성원을 등에 엎고도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데 대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정부의 협상력의 근간은 국민적 동의이다. 그래서 내적 협상이 중요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의회와의 제대로 된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미국 행정부의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한 이와 같은 의회의 역할은 온전히 미국만의 것인가?
이제라도 한국의 시간표를 마련해야 할 때
한미FTA 재협상은 '현실'이다. 우리 측의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구체적 협상카드는 아니더라도 협상을 준비하는 최소한의 태도는 과연 어떠해야 할까? '대한민국 에이스' 송기호 변호사가 '한미FTA의 실체를 비춰주는 등대의 불빛'이라며 추천한 <한미FTA청문회>(최재천, 향연 펴냄)의 한 부분이다.
"현명한 정부라면 그때 협상에서 제대로 이루지 못한 카드들을 준비하고 미국의 재협상 요구에 맞불을 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이 정해놓은 자신들의 시간표, 자신들의 협상 요구조건에 쫓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265면)"
지난 17대 국회 시절 끊임없이 헌법적 관점에서 한미FTA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던 최재천 전 의원이 이야기하는 '사전준비론'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모르나 한미FTA와 관련해 우리 정부와 협상팀은 지나치게 '용어'에만 집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제 '용어'가 아니라 차분히 한국 측의 시간표를 준비해야 한다. 그 시작점은 한미FTA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이 과연 어떠한가를 현재 시점에서 다시 파악하는 것이다. 정부는 2008년 11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해당 연구용역을 의뢰했고 올해 상반기 말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한미FTA의 득실을 재평가해야 한다.
아직 한미FTA는 법적 효력을 갖추지 않은 '미완의 협상'이다. 관행도 아니요, 국내법도 국제법도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확정적인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산이 높은' 한미FTA라면 '돌아갈' 방법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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