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있었던 일' 하면, 뭐 좋은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 그런 것이 대부분일 거다. 또 그게 여행의 주된 목적이기도 하고. 근데 이번 섬진강 꽃맞이 여행(매화와 산수유 꽃 감상 여행)은 좀 색다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지난 16일 광양의 매화마을에서 매화로 꽃동산을 이룬 언덕배기를 굽이굽이 돌다 지친 몸으로 지리산 온천단지를 찾은 때는 이른 저녁이었다. 항상 여행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숙소 잡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많은 사람들은 주말여행을 하기에 말 그대로 숙소 잡기 전쟁을 치른다지만, 나는 항상 주중 여행을 하기에 그런 전쟁은 없다.
'소비자 고발' 나왔어도 소용없어
다만 깨끗한 이부자리가 관건이다. 우리처럼 서민은 별 몇 개 붙은 호텔에 머물 형편이 아니라서 깨끗한 숙소 잡기가 쉽지 않다. 단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깨끗한 모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깨끗한 이부자리가 있는 곳이면 족하다. 그런데 그리 쉽지가 않다. 그 깨끗하다는 기준에 차는 곳이.
한 모텔에 들어가 방을 보여 달라고 했다. 열쇠를 준다. 둘러본 결과, '아니다'였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3만 원이라는데 방이 맘에 들지 않으니 값이 무슨 상관인가. 차를 타고 다른 숙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오래 전 개발된 곳이라 건물들이 낡아 거기가 거기인 듯하여 예전에 묶었던 기억이 있는 모텔을 가자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이유는 이렇다.
"거긴 축제 준비한다고 텐트 설치다, 무대 설치다, 시끄럽던데요. 시끄러우면 잠 못 자요."
"아니 밤에까지 할까? 저녁 때 되면 다 끝나겠지."
"그래도 몰라. 글피가 축제라는데 설치를 끝내려면 밤새워 일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안전하게 다른 데로 가요."
결국 아내 의견이 승리했고, 그렇게 산수유축제장과는 좀 거리를 둔 모텔로 갔던 거다. 모텔 하나를 퇴짜 놓고 소위 '호텔'자가 붙은 곳으로 갔다. 사람도 없고 산수유 꽃 축제는 19일부터이니 그렇게 비싸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겁도 없이 호텔로 간 것이다. 역시 저렴한 값(호텔치고는) 4만 원이란다.
속으로 '오! 예!' 쾌재를 부르고 방을 보니 낡은 건물이긴 하지만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 이부자리도 비록 일회용 커버를 사용하진 않았어도 그런 대로 합격점이다. 그냥 저렴하기도 하고(호텔이 4만 원이라잖은가. 무늬만 호텔이긴 하지만) 그곳으로 택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의 실감은 좀 후에 하지만.
"KBS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에 여관의 시트와 커버 갈지 않고 되쓴다고 나왔는데? 왜 아직도 일회용 이불커버를 사용하지 않을까?"
"나왔다고 다 고쳐요?"
그런가 보다. TV에 지적당하면 즉각 고치던데. 이곳은 아닌가 보다. 돈 없는 서민이 어쩌겠는가? 실은 4만 원도 아주 많이 쓴 잠자리 값이다. 축제만 아니면 예전에 나쁘다는 기억이 없었던(그렇다고 좋다는 기억도 없는) 그곳으로 가 자겠건만. 축제가 괜히 원망스럽다.
마을방송이 기상나팔이 되고
아까 볼 때에는 그런 대로 깔끔했는데. 방에 들어 이부자리를 다시 보니 웬 걸. 여기저기 담뱃불에 그을린 곳들도 보인다. 이걸 어쩌나? 이미 들었으니 물러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나나 아내나 그런 데는 젬병이다. 소위 '착하다'는 성격은 이런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하는 수 없이 찜찜함을 친구삼아 그 방에서 잘 수밖에.
'그저 하룻밤 때우면 되는데 뭐' 하는 게 나나 내 아내의 생각이다. 그러나 불편한 잠자리보다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베개가 높지 않아 우리하고는 맞는다는 거다. 그렇게 찜찜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아, 이장입니다. 주민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그렇게 시작한 마을방송에 화들짝 깨었다. 참 오랜만이다. 적어도 15년 전에 들었던 시골마을의 마을방송을 이렇게 여행 와서 듣다니. 한편으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장님의 마을방송. 새벽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필이면 아침기도회도 없이 단잠을 자는 목사에게 기상나팔을 이장님이 부시다니.
때와 장소가 맞으면 운치 있는 일도, 그게 안 맞으면 기분 잡치는 노릇일 수 있는 법. 지리산 온천단지 이장님의 아침 방송은 바로 그런 거였다. 오랜만에 아침기도회 없이 자보려는 목사부부의 얌치에 찬물을 확 부은 꼴이다.
"이번에 회의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마을은 친환경농법마을로 지정되었습니다. 좀 힘드시더라도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쌀과 산수유 그리고 콩은 꼭 무농약으로 지어야 합니다. (중략) 농약을 쳐서 농사를 지은 것이 발각되면 지원이 없다고 합니다."
귀가 솔깃하다. 어제 저녁으로 순두부백반과 청국장을 먹은 터라 그런가 보다. 이곳에서 무농약 콩이 많이 나는가 보다 생각했다. 이장님의 긴 방송은 계속되었다. 쌀직불금 이야기, 농사자금융자 이야기, 불조심 이야기, 축제 이야기, 대청소 이야기까지, 참 자상하게도 방송을 한다.
이장님 방송 최고의 애청자는 누구?
"저 이장님 방송, 우리보다 더 잘들은 사람 없을 거야. 뭐 유명 DJ 뺨치시는데. 시골 이장님 치곤 표준말에 꽤나 논리적이시네? 좀 긴 게 흠이지만"
"그러게요. 우리는 창문까지 열어놓고 들었잖아요. 하도 방송을 진지하게 하셔서."
"설교 듣듯했어? 하하하."
"호호호."
그렇다. 시골마을 방송의 향수가 있어서 그랬던지, 참 열심히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는 이런 시골마을 방송조차 못 듣는다. 동네와 떨어진 산 속에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시골 방송조차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우리가 산다니. 참 오지도 이런 오지가 없다.
여행지에서의 느긋해야 할 아침잠을 깨운 미운 소리지만 끝까지 우리는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아마 우리처럼 이장님의 방송을 자세히 듣지 못했을 터. 밥하랴, 일하랴, 어디 우리처럼 귀를 쫑긋하고 들을 수 있었겠는가. 여행지에서의 마을방송 경청상! 그런 게 있으면 받을 터인데.
근데 아내가 자꾸 몸에서 무언가 스멀거리는 것 같다고 한다. 이부자리에서 찜찜함이 붙은 거다. "집먼지진드기가 붙었나 봐요" 아내의 그 말에 "그럴 리가?" 했지만, 찜찜함은 나도 마찬가지다. 집먼지진드기가 붙었다고 그리 스멀거리겠는가. 아닌 것 알지만 그 찜찜함은 하루 동안 우리를 괴롭힐 것만 같다. 막 씻고 나왔는데 또 재차 방송이 나온다.
"잠깐만 나오시면 됩니다. 아직 안 나오신 주민들께서는 빨리 나와서 대청소에 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깨끗하게 청소하고 축제 때 오는 손님을 맞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민이 되기라도 한 듯 방송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청소하는 곳이 아닌 노고단을 향하여 차를 몰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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