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중에 한 여인의 슬픈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 여인은 지금 죽은 아들의 상여를 따라가며 슬피 울고 있습니다. 과부인데다가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시에 과부나 고아, 외국인은 사회 안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시민으로서의 어떠한 권리도 누릴 수 없는 딱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 기댈 외아들마저 죽었으니 이제 그 여인은 어찌될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자리에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예수님만 그 여인의 슬픈 울음을 들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은 외세의 지배와 억압에서 풀어줄 강력한 왕, 선택된 민족인 자신들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서 떵떵거리며 살 왕국을 이루어주실 분이 예수님이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서시기만 하면 천지가 개벽하고 새세상이 찾아와 자신들이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대의(大義)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바쁜 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뜻을 품은 그들의 눈에 이 여인의 딱한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겠지요. 아니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딱하고 불쌍하긴 하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나? 큰일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만 올라가시면 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 서두릅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부가 아니라 예수님을 빨리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거야. 서둘러 올라갑시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오히려 그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울지 마라' 위로하시며 그 아들을 살려 여인에게 돌려주십니다. 그 아들이 어떻게 죽은 아들인지 언급이 없습니다. 병들어 죽었는지,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용사인지, 사고를 당한 건지, 왜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얼마나 훌륭한 여인인지, 죽은 아들을 살려 줄 만큼 사회적, 종교적으로 공로가 많은 사람인지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서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아들을 살려주셨답니다.(루카복음 7장 11-17절 참조)
대의(大義) 명분(名分)을 앞세워 양심도 속이고 작은이들의 슬픔이 무시되거나 밀려나는 이 사회의 현실에 큰 가르침을 주는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대의를 앞두고 가련한 여인의 울음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가 이 사회에 필요합니다. 용산참사로 마지막 기댈 곳마저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이들이 화염으로 사라져 간 것은 그 어떤 대의명분을 앞세운다해도 나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노동계의 지도자들이 체면과 단체의 명성을 위해 한 여인의 아픔에 위압을 가하고 모른 체 한 행위는 그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그럴싸하게 포장한다해도 나쁜 짓거리입니다. 이런 모든 아픔이 돈만 많이 벌어 경제만 살리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우리들의 마음 역시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얼만큼 벌어야 잘 사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힘없는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면, 그렇게 해서까지 잘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요? 혹시 나만 불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복불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겁이 납니다. 그래도 김수환 추기경님의 죽음 앞에 그 많은 조문 행렬이 이루어진 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던 추기경님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잘 사는 것 좋습니다. 경제를 성장 시키는 것 좋습니다. 개발을 통해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아주 소수라도 고통이 따른다면 잠시 멈춰 그들의 아픔을 살피고 개선하는 여유와 기다림도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만이 아닌 모두가 잘사는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이들이 웃을 수 있는 사회가 정말 잘 사는 사회입니다.
어느날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쩐 일이냐?"
"형이 어머니 좀 말려 주세요."
"왜? 어머니께 무슨 일 있니?"
"그게, 엄마가 이곳저곳 후원한다고 난리셔"
"좋은 일 하시는데 뭐 잘 못하시는 것도 없구먼."
"한 두 군데라야지. 벌써 수십 군데도 넘어. 이제 그만 하셔도 된다고 형이 좀 말씀드려요. 내 말은 안 들으셔."
어렵게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께 좋은 것 사드시고 친구분들과 즐기시라고 동생들이 모아 드린 용돈을 거의 다 후원금으로 쓰시는 어머니 모습이 동생에게는 좀 속상했나 봅니다.
"엄마,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우리 신부님 생각나서 그렇지 뭐. 후원금 받으러 오시는 신부님들 보면 '우리 신부도 저렇게 고생할텐데' 하는 생각이 나서 도저히 안할 수가 없어요."
오늘도 매달 드리는 용돈을 이곳저곳 시설과 어려운 사람에게 후원하시려 지로 용지 들고 은행을 들어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선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경제를 살린다는 지도자들보다도, 경제성장의 주역이라 자랑하는 기업 총수들보다도 더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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