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뒷산 어디를 봐도 지리산 자락은 요즘 온통 꽃천지입니다. 19번 국도를 따라 흐르는 섬진강가에는 매화랑 산수유 그리고 목련에 개나리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꽃길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 도로에 나가보니 벚꽃도 더러 피는 게 보입니다.
꽃 피는데,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올해는 예년보다 벚꽃이 열흘 정도 일찍 핀다더니 다음주 초 쯤이면 벚꽃까지 활짝 피어서 섬진강 꽃길은 황홀하여 숨이 막히겠지요. 물 오른 나무에 새 잎이 돋으며 내는 연둣빛 채색이 강을 더 아름답게 하니 잔인한 4월이 가까이 오긴 왔나 봅니다.
지난 목요일, 시창작론 시간에 곽재구 교수님께서 과제를 내 주셨습니다.
"살구꽃, 목련 아름답게 피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다음 주까지 꽃을 주제로 시 한 편을 써 오세요. 큰 살구나무 아래서 그냥 두어 시간 앉았다 와도 좋습니다. 살구나무 안고 이야기 하다가 와도 좋습니다. 나무하고 이야기 하는 게 시 쓰는 일 아닙니까?" 어린아이 같으신 표정으로 쉽게 과제를 내주셨지만 시를 쓰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아내와 함께 구례 산동면 상위마을에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축제 중이라 붐빌 것 같아 아침 일찍 갔는데도 꽃나무 아래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꽃만큼이나 많습니다.
꽃만큼이나 관광객이 많건만...
꽃처럼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모델이 되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 모두 소풍을 나온 초등학생 같습니다. 우리도 풍광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더러 열매를 따지 않은 나무들이 보입니다. 궁금해 물어보니, 작년에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서 일손이 모자라는 집은 따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답니다.
길에서 만난 상위마을 어르신께도 워낙 열매가 많이 달린 데다가 중국산이 들어오는 탓에 값이 없어 수확을 포기하는 집이 많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는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 옵니다.
농사 짓는 사람으로서 애써 가꾼 열매를 값도, 일손도 없어 수확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아는 탓에 노란 꽃보다 붉은 열매에 더 눈이 갔습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가 노란 꽃밭인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붉은 빛 열매 천지입니다.
십여 년 전 만해도 산수유 몇 그루 있으면 자식 대학공부 시킨다는 효자나무였는데, 요즘은 수입산 때문에 값이 워낙 없어 따는 품삮도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여 농민들 한숨소리가 크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로 매실과 차농사를 짓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실과 차 잎 값이 좋아서 너도 나도 심다보니 생산이 넘쳐 작년에는 차 잎을 따지 않는 농가가 꽤 많았습니다. 개인 사이트를 만들어서 직거래를 하는 사람은 그런대로 팔지만 상인이나 농협에 수매를 하는 사람들은 아예 수확을 포기하는 게 다반사입니다.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이지요.
기다려, 가을에 열매 따러 올게
한 나무 아래 가니 표찰이 달려 있습니다. 체험학습이라도 했는지 자기 산수유나무를 정해 이름표를 달았습니다. 가을에 열매따러 온다는 약속을 잘 지켰는지 그 나무에는 여태 달려있는 열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표를 보니,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산수유 나무 하나씩 맡아서 자기 이름표 달아두고 가을에 다시 와서 아이들과 함께 열매도 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름 주고 풀 베는 것은 농부의 몫이지만 열매 따는 일손이라도 덜어 드린다면 우리같은 농민들은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기좋은 지리산 자락에 소풍 오듯 와서, 하루를 자연 가운데서 일을 하면서 아이들한테 노동의 즐거움을 몸으로 가르쳐 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는 듯 일하는 듯 그렇게 하루를 보내므로 도농상생의 길을 찾고, 젊은이들 귀한 농촌에 새싹같은 아이들 노는 모습과 웃음 소리만으로도 어른들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농사 지으랴 공부하랴 바쁜 봄이지만, 숙제를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아내와 함께 둘러 본 지리산 산동마을은 축제한다고 온통 잔칫집 분위기인데, 노란 꽃밭에 매달린 붉은 열매를 보니 우울한 마음도 자리를 잡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도 판로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농촌을 생각하면 막막합니다. 더우기 수확철에 일손이 모자라 애써 지은 농사를 포기하는 어른들 가슴은 오죽하겠습니까? 매화가 핀 걸 보니 올해 열매가 엄청 달릴 것 같은데, 풍년이 되어도 걱정을 해야하는 자신을 다독이며 산수유 꽃그늘에 앉아 숙제를 했습니다.
우울한 봄산동 골짜기에 산수유꽃 붉게 피었다곱게 늙은 할매 유두 몇 알시새움 많은 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혹시, 젊은 사내의 애무를 기다리는 동안노란 꽃밭에선 우리네 농촌이 각혈을 한다일손 귀한 날바람처럼 스쳐가는 저 남정네절정도 모르는 젊은이 열이면 무엇할까산동 골짜기 산수유밭에올봄, 붉은 꽃 피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