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
대학 입학 때부터 철학책을 즐겨 읽었는데, 지난 십여 년의 구비구비마다 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이 있다.
국문학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공대에 들어갔지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자양분을 얻었다. 문학에는 글을 읽는 행위와 이야기로 나누는 행위, 그리고 직접 글을 쓰는 행위가 있는데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내 글을 쓰기에 철학이 너무 빈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의 긴 여정이 그 때부터 시작된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와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철학의 초심자에게 좋은 도우미가 돼 주었다. 러셀이나 코플스톤 같은 철학사를 여행하면서 서양철학(근대철학까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서양철학을 보면서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는 동양사람인데 서양철학으로서 대부분의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면 올바른 철학여정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미처 공맹과 노장, 그리고 한비자나 '자' 자 들어가는 동양철학으로 물흐르듯 넘어갔다. 기형도나 안도현 시인 등과 결별한 시점도 이 즈음일 것이다.
군 생활 동안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조그마한 불법을 저지름으로써 철학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모두 잠든 심야에 근무가 없는 날에는 화장실 불빛 밑에서 <에티카>를 다시 읽고 플라톤을 읽었다. 운 좋게 행정병으로 선발된 것도 있지만 부대 분위기가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 '짬밥'이 찼을 때는 주말마다 사무실로 가서 하루 종일 독서에 빠져들곤 했다. <소피의 세계>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러다가 전역 후에 철학을 꽤 오래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사회 현안에 깊이 천착하고 싶어서 대중 교양서를 많이 읽었다. 우석훈이나 장하준, 박노자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내가 연결돼 있는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읽어낼 감수성을 익혔다.
하지만 지금은 이 책들을 뒤로 하고 다시 철학책을 읽고 있다. 아무래도 변덕이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십여 년간 독서의 방향타를 다듬어 왔고, 사회와 함께 책을 읽는 훈련을 해오면서 내가 어떤 책을 읽고 행동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지금 필요한 책은 철학책과 고전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문제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살펴본 바로는 수십 년 동안 엉켜 있는 모순의 실타래가 있다. 그것은 당대의 지성만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맹자의 위 구절을 요즘 자주 들여다 본다. 마치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며 세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힘을 조금씩 모으듯 우리가 쌓아온 지혜의 우물에서 자꾸 물을 긷고 싶다.
인류가 정성스럽게 쌓아온 지성의 보고를 최대한 이용해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사상이 요구된다는 것을 직관으로 느낀다. 나는 이런 패러다임을 창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리더십(ledership)이 아니라 펠로우십(fellowship)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박이문 교수는 이 차이가 대표적인 철학사 서술 방식의 차이라고 말한다. 즉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와 문제 중심적인 철학사가 분리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읽었던 철학사는 물론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다. 철학과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역사 중심적인 철학 교수법을 세례받았는데, 그들은 철학자가 제시한 철학을 현재 나의 문제, 나의 시대의 당면문제로 전환해서 재구성하는 것을 나의 책임으로 돌렸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당시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철학자들의 메시지로 풀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작업은 일반 독자가 하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고 얽힌 당면문제가 철학자의 몇몇 사상으로 단숨에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철학 교육자들의 상상력 부재를 증명하였던 셈이다.
사춘기를 넘어 이만큼 성장한 철학소설 <드림위버>
<드림위버>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것이 비록 철학의 최신 흐름이 아니라 외서가 국내에 소개되는 순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철학사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당대, 현실의 문제 나의 주변의 문제로 철학사의 관심사가 전환되는 것은 철학사의 하나의 진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독일에서 6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현재적 가치에 충실하면서, '현재적 물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영원한 질문의 다른 표정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드림위버>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소피의 세계>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이 무기를 통해 기본 명제로 달려갈 수 있지만 그 명제가 나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소피의 세계>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면,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드림위버>는 바로 <소피의 세계>를 비롯한 기존 철학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철학사는 보학(譜學), 즉 자신들의 족보를 밝히는 작업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물질화, 비문화화, 비인간화, 소외화에 대해서 별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 않다.
대중들은 직면한 문제와 철학의 관심사가 멀어지는 순간 철학을 배부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 <드림위버>를 비롯한 새로운 철학, 즉 당면문제 중심의 철학 서술작업이다.
이와 관련된 철학 담론 중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철학사=철학' 담론이다. 철학사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작업이 역사가 아니라 '철학'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서 철학사를 살펴보기 때문에 현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들이 현재성을 불어넣기 위해 한 작업이라고는 과거의 철학사를 현대어로 번역한 수준에 불과하다. 박이문 교수도 "철학사는 과거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철학적 지식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곧 철학적 사유는 아니다"고 규정했다.
그 외에도 내가 철학을 보면서 가장 중시하는 '사랑의 방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적 철학은 자신의 애정을 선대 철학자들에게 쏟는다. 철학자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승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당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은 당대인에 대한 애정으로 넘친다. 비로소 자신과 같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당대인들의 문제를 공감하며 그것을 철학으로 표현한다. 내가 철학서를 고를 때 이 기준은 무척 중요하다.
이제 <드림위버>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안'이라는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학자인 학구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담론에 쉽게 빨려들어갈 수 있다. 이런 캐릭터가 그러하듯이, 그는 늙수그레한 지성을 가지고 당면문제에 대해서 엄밀히 따져보고 가공의 노인과 함께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에서는 부모님과 그 문제를 환기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방식이 <드림위버> 서술의 큰 틀이다.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할 수 있는 '숙련된 조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설정은 차라리 솔직하고 전략적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이 책을 보는 대중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주기는 하지만 철학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의 지성은 총 155명인데 단지 철학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실은 과학철학자)나 헤르만 헤세 같은 문학자, 칼 융 같은 심리학자, 유클리드 같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철학의 주제가 철학자에서 철학자로 계승된 이전의 방식을 넘어서는 '철학의 다양성'을 확보한 진전으로 볼 수 있다.
하루에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다 보면 오래 전 느끼다 만 '법열'(法悅)이 생기는데 나의 생각이 자라는 느낌은 언제든지 기분이 좋다. 때문에 박이문 선생이 <드림위버>의 추천사에서 밝힌 평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의 본질이 사유에 있고, 사유의 본질이 어떤 특정한 대답의 발견에 앞서 어떤 문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열린 과정에 있다는 점을 전제할 때, 이 책은 <소피의 세계>보다 성숙하고 철학적 방법이다. - <드림위버>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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