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나라에서 책이란
요즈음 들어, 헌책방 나들이를 '순례'로 여기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곧잘 들리는 가운데, '불황에 싼값으로 책을 사는 일'로 헤아리는 눈길이 곳곳에서 자주 보입니다. 헌책방이란 헌책이 있는 곳이고, 헌책이란 한 번 읽히거나 버려지게 된 책을 가리킵니다. 한 번 팔렸던 책인 만큼 처음 붙은 값과 견주어 싼 책이 사고팔리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헌책방에 책을 내다 판다 했을 때에는 마땅히 1/4이나 1/5이 안 되는 값을 받고 팔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헌책방에 찾아가 그 '헌책'을 살 사람을 생각해 본다면, 새것도 아닌 물건을 절반 값에라도 사는 일이란 '비싸다'고 느낄 테니까요. 어떤 이들은 '버려진 책을 그러모아 파니 싸게 팔아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만, 버려진 책이든 안 버려진 책이든, 이 책을 그러모아서 손질하고 다루는 사람 일손을 돌아본다면 '일꾼 한 사람이 바친 땀과 품'에 걸맞는 값을 치러야 함을 잊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헌책방 헌책이 푸대접을 받는 까닭은 헌책방에 있지 않습니다. 새책방 새책부터 푸대접을 받기 때문에 헌책방 헌책이 푸대접을 받습니다. 새책방에 들어온 새책이라면 마땅히 책 겉에 적힌 값대로 사고팔려야 합니다. 때때로 단골한테 조금 깎아 주는 일이 있을지라도, 어떠한 책이든 '책에 붙이는 값만큼 품과 땀과 세월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 책을 쓰고 엮고 다루는 사람들이 먹고살자면 그 값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깎아팔고 후려치고 하는 인터넷책방이 넘칩니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는 빈틈없이 '정가제'를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정가제를 안 합'니다. 여느 인터넷새책방은 40%를 웃도는 깎아팔기를 할 때마저 있습니다. 출판사들이 해마다 벌이는 책잔치에 가 보면, 제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30%씩 깎아서 파는 장터를 열어 놓습니다.
세상 흐름이 이러하니, 새책은 새책으로서 제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새책부터 처음에 100%가 아닌 60∼70% 값으로 팔리는 꼴입니다. 그러면 헌책은 어떠해야 할까요? 아니, 헌책 한 권 값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그러면서 헌책방에 책을 팔러 가면 얼마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요사이는 중간마진을 덜어낸다고 하면서 '개인 인터넷책방'이 열리고, 여러 인터넷새책방에서 '헌책 파는 칸'을 열기도 하는데, 헌책방에서 새책을 받아 새책 값대로 파는 일하고, 새책방에서 헌책을 후려치기로 파는 일은 크게 다릅니다. 우리 책 문화를 흔들고 우리 책 흐름을 무너뜨립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스스로 책을 책이 아니도록 바라보게 하고 맙니다. 책을 값싼 짐짝으로 여기게끔 합니다. 책을 한 번 보고 버리는 쓰레기쯤 생각하게 이끕니다.
두고두고 읽히는 책이 아니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내 손을 거쳐 다른 이한테 넘어가면서 새로운 빛줄기를 꾸준히 나누게 되던 책은 사라지고 있는 우리 터전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라져도 책은 남아서 뒷사람한테 우리들 슬기와 보람을 흐뭇하게 물려주던 고리가 끊어지는 우리 삶터입니다.
어쩌면, 책이 책다운 대접을 못 받기 앞서,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못 받습니다. 우리는 착하고 맑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아요. 시험점수 잘 받아서 동무를 꺾어 누르고 일류대학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싸움 기운을 학교에서 얻어들입니다. 교과서는 한 사람 넋과 얼이 튼튼하고 싱그럽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아니라, 틀에 박힌 지식을 어긋남 없이 외우도록 길들이는 채찍 구실을 합니다. 세상을 밝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언론길이 사라지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러는 동안 책 하나로 함께하던 빛이란 가뭇없이 흐리멍덩해집니다. 새책이든 헌책이든 똑같은 책임을 잊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사람이 책을 버리며, 사람이 말을 버립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생각을 버리고, 우리 넋을 버리며, 우리 마음을 버립니다.
(2) 어떤 삶으로 책을 엮는가
집에서 아기를 함께 돌보다가 고이 잠든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잠깐 바깥바람을 쐬기로 합니다. 오늘은 어디로 나들이를 해 볼까 가누면서 골목마실을 할는지 헌책방마실을 할는지 곱씹다가, 헌책방마실을 하기로 합니다. 전철을 타고 부개역으로 갑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 좀 오래 걸릴 텐데, 그래도 책 하나 만나는 나들이를 하고 싶어 좀이 쑤시던 터라, 얼른 돌아보고 후딱 돌아오자고 생각합니다.
아기 돌보기에서 풀려난 몸이라 짧은 전철길에서도 책 하나 달디달게 읽습니다. 벌써 부개역에 닿아 내리게 되니 섭섭하지만, 이제 새로운 책을 만난다는 즐거움에 들떠 부리나케 종종걸음을 합니다.
헌책방 〈책사랑방〉에 닿아, 책방 아저씨한테 꾸벅 인사를 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둘을 키우는 〈책사랑방〉 아저씨는 저한테 '아이를 낳아 길러 보니 어떠하느냐'고 묻습니다. 아이들이 이제 어느 만큼 크다 보니 예전에 겪은 힘든 일은 다 잊고, 이맘때 셋째를 낳아 키우면 얼마나 귀여울까 싶다고 말씀합니다. 옆지기 어머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둘레 어른들도 느즈막히 막둥이 하나를 더 낳아 키우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말씀을 곧잘 합니다. 누구한테나 갓난아이 처음 키울 때에는 몸과 마음이 고되면서도 보람이 있고, 이 보람으로 하루하루 버티어 내는 가운데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는 셈일까요. 그렇다면, 이런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기쁨이란 아주 소담스럽고 아름다울 테며, 이런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기쁨을 거의 모두 여자들만 맛보는데, 남자들은 참으로 딱하겠구나 싶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참맛을 잃는다고 해야 할는지, 돈벌고 술먹고 동무들 사귀는 데에서도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보람은 있을 터이나, 남자들이란 부질없는 데에서 기쁨을 찾으면서 정작 자기 가까이에 있는 한결 넉넉하고 따순 기쁨은 못 보거나 지나친다고 해야 할는지. 이리하여 여느 아버지 사랑보다 여느 어머니 사랑이 훨씬 깊으며 넓다고 이야기를 하게 될는지. 많은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든다고 할는지.
두런두런 안부를 나누고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는 틈틈이 책을 구경합니다. 두툼한 문화인류학 보고서인 《C.W.쎄람/안경숙 옮김-낭만적인 고고학 산책》(평단문화사,1984)이 보입니다. 이분 책은 곧잘 우리 말로 옮겨지지만 그리 널리 사랑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품절과 절판이라는 길을 걸으면서도 꾸준하게 새로 옮겨지고 읽힙니다. 헌책방을 더 다니면서 알아보아야 할 텐데, 어쩌면 1984년에 나온 이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이 나라안에 처음 옮겨진 쎄람(세람) 님 이야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책 《임종진-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랜덤하우스,2008)를 구경합니다. 이 책을 구경하고 있자니, 〈책사랑방〉 아저씨가 "그 책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금세 나갈 줄 알았는데 안 나가. 왜 그런가 하고 들여다보는데, 책을 살펴보니까 안 나갈 만하더라고." 하고 한 말씀. '김광석'이라고 하면 껌뻑 죽는 사람이 많다지만, 〈책사랑방〉 목록에 띄워진 지 반 해가 넘도록 안 나가서 궁금하게 여기셨다는데, 헌책방 일꾼으로서 생각하기에 이 책은 '김광석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추억으로 팔아먹는'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하니, 독자들이 안 사지 않느냐 싶었다고. '그런가?' 하고 생각하며 책을 넘겨 사진을 보고 글을 읽습니다. 이야기를 백 번 듣기보다 몸소 한 번 살펴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겠다고 느끼면서.
.. 그래서 어깨를 뒤로 살짝 빼면서 다리를 구부렸습니다. 대신 눈높이를 살짝 맞추었지요. 그리고 정말 살짝 손을 잡아 봤습니다. 심장은 벌렁댔지만 그의 손등은 정말이지 따뜻했습니다. 한 컷을 눌러 주고 카메라를 제게 주려던 즉석 사진사에게 부탁해 한 컷 더 눌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두 컷이 남았습니다. 나중에 현상해서 보니 참 신기하고 좋더군요. 첫 컷의 어정쩡한 포즈가 두 번째 컷에서는 편히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역시 여러 번 셔터를 누를수록 사진 앞에서 우리들 자연스러워지나 봅니다. … 그렇게 좋아했더니 인연이 닿더군요. 뭐 행운이 조금 따른 것이겠지요. 주변에선 부럽다고 종종 시샘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냥 "내가 그 양반 많이 좋아하잖아. 그래서 그렇지 뭐." 해버리고 말지요 … 1995년 여름, 천 회 공연이 있던 날, 무대 뒤 대기실 거울 앞에서 떡하니 형을 만났습니다. "저 취직했어요. 사진기자 되었어요." 어느 순간 취재라는 명목으로 형 앞에 섰습니다. 커다란 카메라에 대포 같은 렌즈 자랑하며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접었다 했습니다. 괜스레 어깨에 힘도 주고 그랬지요. 기자가 되었으니 속으론 더 자주 만날 수 있겠구나 싶어 은근히 자랑질하려는 뻔한 수작이었지요. 그런데, 그냥 씨익 웃어 주고 말데요. "그랬구나." 이 한 마디뿐이데요. 짧게 보인 그 얇은 미소가 왜 그리 쓸쓸했는지. 차라리 처음처럼 그랬으면, 우쭐댈 것 없이 그냥 처음 맘 그대로 찾을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네요 .. (33∼36쪽)
책에 실린 수많은 사진들은 노래하는 김광석 님을 사랑하는 분들한테 애틋함을 불러일으킬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사이사이 곁들여진 사진쟁이 임종진 님 글은 거의 군더더기와 같습니다. 아니, 이 책에 실린 사진이 노리는 '추억 불러일으키기'를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김광석을 많이 좋아했던 어느 사진쟁이 한 사람 짝사랑 이야기'일 뿐, '김광석을 아끼고 사랑한 숱한 사람들한테 다가서려고 엮은 이야기'까지는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자꾸자꾸 듭니다. 김광석 님이 살아 있을 때 글쓴이가 철없는 짓을 했다는 말처럼, 글쓴이는 김광석 님이 죽고 없는 이 마당에도 철없는 짓을 하는 셈이랄지. 떠나고 없는 이를 그리는 마음이야 누구나 홀가분하게 펼칠 수 있습니다만, 떠나고 없는 이를 그리는 수많은 사람들 가슴녘을 고이 보듬거나 어깨동무를 할 마음이 있었다면, 글매무새를 아주 크게 손질하고 추슬러야겠구나 싶습니다.
《천주교 순교성지 절두산》(가톨릭출판사,1987)을 집어듭니다. 이 책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자리한 '절두산 순교성지'가 어떠한 곳이고 이곳 박물관에 어떤 유품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모음입니다.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면서 전철길에서 흔히 넘겨다보게 되는 절두산 순교성지인데 아직 이곳을 찾아가 보지는 못했고, 어디에 이어지는 길이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자료모음을 죽 살피니, 천주교회에서 돈을 모아 1956년에 이곳 터를 처음 장만했고, 다른 터를 더 장만했어야 하나 돈이 모자라 더 장만하지는 못한 가운데 기념관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처음 기념관이 들어서던 무렵 옛날 사진이 여러 장 담겨 있는데, 오늘날 보는 한강 둘레하고 사뭇 다릅니다. 한강가에 밭을 일구는 모습이 보이고, 기와집과 풀집도 듬성듬성 보입니다. 고작 마흔 해나 쉰 해쯤 지났을 뿐인데,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어요.
.. 1984년 5월 3∼7일, 5일 동안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념을 기념한 사목 방문이었다. 이 기간 중인 5월 6일은 길이 기억될 거룩한 날로서,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집전으로 103위 한국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른 날이다. 기해ㆍ병오박해 때의 순교자 79위와 바로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24위가 함께 성인 반열에 듦으로써 세계 교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찬양받게 된 것이다 .. (13쪽)
자료모음을 넘기면서, 순교성인이 모셔진 지는 얼마 안 되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 순교성인을 기리게 된 일은 아주 큰 고마움이요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데,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순교성인 이야기를 천주교 신자들은 얼마나 널리 알거나 헤아리거나 살피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세례를 받는 새 신자들은 우리 순교성인 이야기를 얼마나 듣거나 배우고, 제 세례이름에 우리 순교성인 이름을 얼마나 쓰고자 하는가 궁금합니다. 아니, 우리 나라 신자들 가운데 김대건과 정하상 같은 분들을 뺀 다른 순교성인으로 누가 있는지를 헤아리는 분들은, 또 믿음을 저버렸다고 하는 정약용 형제 집안이라 하지만 이들이 보내야 했던 삶과 죽음을 곰곰이 되씹는 분들은, 우리 나라에 천주교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불교든, 이러한 나라밖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기리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톺아볼 줄 아는 분은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1969년 12월 25일에 서울-인천 간 강변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한강변에 연해 있는 절두산 성지의 출입도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최석우 관장 신부는 합정동에서 절두산 성지로 통할 수 있는 지하도로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 씨와 박순천 씨의 협력을 받아 서울특별시 당국에 제안하여 강변도로 밑으로 다닐 수 있는 지하도로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 두 대가 통행할 수 있는 넓이 4미터, 길이 34미터 규모의 지하도로가 설치되었다 .. (20쪽)
절두산 순교성지에 가는 길이 왜 그리 되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피식 웃음이 납니다. 어쩜, 서울시라고 하는 행정관청은 길을 새로 닦는다고 하면서 '예전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 삶터를 뚝 끊어지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기는, 종교단체 건물이 아니라도 여느 사람들 살림터를 마구잡이로 허물어뜨리는 행정관청입니다. 재개발과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은 끝없이 집을 옮겨 다니게 하는 행정이요 관청입니다.
《천주교 개포동성당 현앙위원회-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천주교 개포동성당,2005)이라는 책을 들여다봅니다. 서울 개포동에 있는 성당에서 비매품으로 엮은 책인데, 브뤼기에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책을 다 묶나 궁금합니다.
.. 1835년 10월 7일 소 주교(브뤼기에르/소 바르톨로메오 주교), 중국인 라자로회 회원 고 신부, 중국인 왕 요셉은 무장한 고용인들을 데리고 봉황성을 향해 서만자를 떠났다. 서만자에서 봉황성 변문까지는 장장 2천 리, 여행 도중에 떼도둑과 맹수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고용인들을 무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런데 이튿날 소 주교는 저녁을 먹은 후에 갑자기 발병하여 중국인 라자로회원 고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홀연히 선종하고 말았다. 소 주교의 나이 43세. 소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발하여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에서 선종하기까지 3년 넘게 위험하고 험난 여행을 감행하다가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소 주교는 조선 임지에 부임하려고 애쓰다가 기진맥진해서 숨을 거두었으니 .. (32쪽)
저런. 1832년부터 1835년까지 길에서 떠돌다가 죽은 사람이었군요. 옛날이니 그렇겠구나 싶으면서, 옛날이니까 이렇게 고된 길을 걸었겠구나 싶으면서, 이처럼 길에서 죽은 그분은 죽어 눈을 감는 그때에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리게 됩니다. 뜻을 펼치기는커녕 아무것도 못한 채 개죽음이 되었다 할 텐데, 그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그분은 떠난 그 자리에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곱씹게 됩니다. 또한, 이 죽음을 알뜰히 여기면서 백일흔 해 만에 비로소 '서한집'을 엮어낸 뒷사람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천주교 신부로 조선에 들어와 믿음을 나누려는 뜻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지만, 당신이 걸어온 길 이야기는 오래도록 조용히 묻혀 있다가 이제는 살며시 꽃을 피웠습니다.
.. 우리는 아무 불행한 사고 없이 우리 여정을 마쳤습니다. 첫 번째 여행에 비하면 이번 여행은 즐거운 소풍과도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평야 지대에서는 허기져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 산악지대에서는 먹을 것도 있었고, 게다가 나는 걷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사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탄 조그만 마차의 내 자리는 몹시도 좁았습니다. 도시나 촌락에 가까워질 때마다 매번-중국에는 도시와 촌락이 정말 많기도 합니다- 뚱뚱한 중국 길잡이 한 명이 나를 보호한답시고 내 몸을 반쯤 타고 앉아서, 어떤 나그네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를 보호한다는 것이 오히려 중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마차 안쪽에 누가 있는지 기어이 알고 싶어했고, 또 끝내 들여다보고 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139쪽)
제가 걷는 길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걷는 길도 개죽음과 같은 길이 될는지 생각해 봅니다. 하루하루 버티면서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하루하루 버틴다기보다 하루하루 좀더 힘내어 살자고 다짐하는데, 이런 하루와 하루가 모인 제 삶은 얼마나 저한테 뜻이 있고 보람이 되는가 생각해 봅니다. 뜻을 펼치든 못 펼치든, 이렇게 걷는 한 걸음과 두 걸음이 아름다운지, 이렇게 내딛는 걸음이 열 걸음에도 미치지 못하고 고꾸라지게 되더라도 아름다운지, 아니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하고 푹 쓰러져도 아름다운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 교우 두 명이 나를 조선 국경에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길은 내 생각에 너무 위험했고, 내가 가려는 길은 그들에게 낯선 길이었습니다. 이 길에 대한 소문이 고약해서 그들이 이 길을 답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추위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야 할 산들이 있었고(나는 그런 산을 올라가 봤는데, 내가 몹시 추위를 타기는 하지만 추워서 떨기보다는 온통 땀으로 젖었습니다), 때로는 화적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황야들이 있어서, 화적들에게 강탈당하거나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거나 또는 아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음산한 얘기는 어쩌면 과장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 사실이었습니다 .. (154쪽)
브뤼기에르 님은 고된 길을 걷는 가운데에도 부지런히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참으로 긴 나날에 걸쳐 잠들어 있었지만, 백일흔 해 만에 알아본 눈길에 따라 빛을 보았습니다. 저나 옆지기나 우리 아이나, 우리 세 식구가 걷는 길도 어느 결엔가 픽 무릎이 꺾이며 오래도록 잠들게 될 수 있는데, 우리들 뚜벅걸음을 먼 뒷날 알아보아 줄 손길이 있을는지. 아니, 알아보아 주건 말건 우리 세 식구는 오늘 하루를 우리 깜냥껏 즐겁게 꾸리고 있을는지.
책을 덮고 오늘 아침부터 저녁 이맘때까지 보낸 자취를 더듬습니다. 밤새 기저귀 갈고 치닥거리하고 씻기고 빨래하고 밥하고 차리고 치우고 글쓰고 아기랑 놀고 빨래하고 마른 빨래 걷고 개고 밥하고 먹고 치우고 아기랑 놀고 글쓰고 허리 잠깐 펴면서 드러눕고 다시 일어나서 아기랑 놀고 기저귀 빨고 걷고 널고 개고 하던 하루를.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이라고 다르지 않을 하루를. 8월 16일과 9월 16일과 오늘 하루가 거의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데, 거의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하루 가운데 아이는 나날이 다르게 자라고, 이 다 다르게 자라는 느낌을 식구들은 어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3) 남자와 여자와 책
1998년에 'Collins'라는 곳에서 만든 《the world physical》이라는 세계지도 한 장을 골라들고 나서, 《오숙희-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그린비,1991)이라는 산문모음을 집어 봅니다. 오숙희 님이 처음 쓴 책입니다. 판이 끊긴 지 한참 되기는 했지만, 이 책은 인터넷새책방 '절판 목록'에조차 뜨지 않습니다. 아직 세상에 이름이 적게 알려진 1991년 오숙희 님 이 이야기책을 알아보고 펼쳐들었던 손길은 얼마나 될는가 헤아리면서, 그무렵 이 책을 기꺼이 사 읽었던 누군가를 함께 헤아립니다.
.. 강의 처음부터 나는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학생들의 상당수가 여성이 차별당하고 있는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옛날에는 여자들이 정말 고생했지만, 요새는 다르다고 봅니다. 밥은 전기밥솥이 다 해 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 주고, 음식도 돈만 있으면 슈퍼에서 사서 먹을 수 있잖아요." …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반발이 덜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일부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일부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의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제법 똑똑한 여학생들 중에는 차별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못났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거부감을 표시했다 .. (12쪽)
아이를 키우는 동안, 아니,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둘레 사람들은 쉴새없이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애 아빠가 밖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와야 아이가 나중에 걱정이 없고 부모를 고마워한다고. 아기 돌보기는 애 엄마한테 맡기고 애 아빠는 한창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그래야 나중에 아이가 부모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혼자 살 때에는 빨리 장가가라 했고, 장가를 가니 아이를 낳으라 했고, 아이를 낳으니 돈을 벌라 합니다. 그렇다면 돈을 번 다음은? 아파트를 사라는 이야기일까요? 그 다음에는 얼른 자가용 굴리라는 이야기일까요? 그 다음은 식구들하고 나라밖 나들이를 다니라는 이야기일까요? 그 다음에는? 시골에 좋은 집이나 땅 사두라는 이야기일까요?
둘레 사람들 도움말씀을 말없이 다 듣고 난 다음 으레, "네, 말씀 고맙게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두 사람은 둘이서 아이를 함께 돌보고 살아가는 일이 아이한테 해 줄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애 아빠가 돈을 벌어온대야 그 돈으로 사람을 쓰고 뭐를 쓰고 하면서 아이한테 들어갈 텐데, 그럴 바에야 돈을 적게 버는 만큼 제가 그 모든 일을 하면서 함께 지낼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하고 대꾸합니다.
만화책 《빈민의 식탁》을 보면, 이 만화책 주인공인 '백수 아빠'는 자기 딸아이가 어느 날 회사 나가는 자기 바지가랑이를 붙잡으면서 '아빠 가지 마, 나랑 놀아!' 하고 떼를 쓰니, 이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사랑스러워 그날로 사표를 던지고 세 식구가 집에서 도란도란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지냈다고 나옵니다. 만화이니 이렇게 한다 할 텐데, 그래도 《빈민의 식탁》 주인공인 아빠는 세상 어느 누구한테도 없는 아이사랑과 아내사랑으로 작은 집에 늘 기쁨이 넘치도록 합니다. 찬장에 먹을거리 하나 거의 없다시피 하여도 주인공 아빠는 멋진 솜씨를 뽐내며 아이들뿐 아니라 이웃사람 모두 뿅 가게 할 만큼 밥을 차립니다.
몇 해 앞서 이 만화책을 볼 때에는 그냥 키득키득 웃기만 했는데, 정작 제가 그 《빈민의 식탁》에 나오는 '백수 아빠'와 같은 자리에 서다 보니, '한창 젊을 때 아이랑 씨름하면서 지내는 일' 만한 보람과 사랑과 기쁨은 다시는 없겠구나 싶어요. 한창 때이니 한창 아이하고 어울려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 "그래요. 이처럼 근거없는 믿음을 우리는 편견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편견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여러 친구들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차별을 받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한 번도 '왜?'라는 의문을 던져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탐정이 되는 겁니다. 주위를 세심히 살펴봅시다. 세상사람이 모두 그것이 옳다고 해도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일단 의심해 봅시다" … 사례가 하나둘 발표되자 여학생들 중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고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남학생들은 무슨 신기한 얘기나 듣는 듯이 몸을 앞으로 하여 귀를 기울였고, 또 몇몇은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필시 자신의 여형제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귀중한 수업시간에 왜 하잘것없는 여자들의 신세 타령을 듣고 있나 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도 있었다 .. (25∼27쪽)
그렇지만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애 아빠는 집에서 아이랑 씨름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돈벌이와 씨름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아이 돌보기는 애 엄마한테만 맡겨지고, 저절로 남자와 여자 자리와 몫과 일이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푸대접이 싹트고, 더 큰 믿음과 사랑보다는 안타까운 따돌림과 괴롭힘이 고개를 쳐듭니다.
남녀 모두 바깥일을 하며 뜻을 펼치는 삶 못지않게, 남녀 모두 집안일을 하며 사랑과 믿음을 고이 나누고 어깨동무하는 삶이 크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안팎 고루 함께하면서 아이를 얼싸안고 세상을 부둥켜안아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여 민주든 자유든 평화든 평등이든 이 나라 이 마을 이 집안에 깃들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우리 어머니는 찬밥이 있으면 남자들 밥만 새로 하고 딸들에게는 우리 찬밥 볶아먹자 그러세요." "어머니는 밥상에서 남은 음식을 보시면 꼭 딸들한테만 '이거 마저 먹어치워라' 그러세요. 여자는 그래야 하는 법이라구요."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에 시골 외가에 갔다가 울고 온 적이 있어요. 외종사촌들과 수박을 먹는데 할머니가 자꾸만 심부름을 시키는 거예요. 심부름을 하고 오니 수박이 하나도 안 남았잖아요. 할머니가 친손주들 먹일려고 나를 뺑뺑이 돌린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는 결국 노후를 우리 집에서 보내세요. 요새도 수박철이 되면 수박을 먹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여학생들의 입을 통해 '여자로 살아온 기억'들이 하나둘 튀어나올 때마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 몇몇 여학생들이 발끈했다. "우리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먹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것에서부터 은연중에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어릴 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데서 부모의 사랑을 재게 됩니다. 특별히 기억력이 좋아서 옛날 일을 못 잊는 것은 아니에요. 잊고 싶어도 안 잊혀지는데 어떻게 해요!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사실 학생들이 찾아낸 가정 안에서의 성차별은 상당히 다양했다 .. (59쪽)
집일을 하면서 날마다 느끼는데, 집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책 펼칠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고, 책 펼칠 겨를이 없이 바쁘고 고된 가운데 깨닫고 얻는 슬기가 많습니다. '책을 읽어 얻은 지식'은 아닌데, 나중에 틈을 쪼개어 책을 읽다 보면, 책에 담긴 슬기가 하나같이 '우리 스스로 온몸으로 삶을 부대낀 데에서 얻어지'곤 한다고 느낍니다.
대학교에서 학문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슬기가 아닙니다. 회사에서 온몸 바쳐야 깨닫는 슬기가 아닙니다. 여행을 다닌다든지 산을 탄다든지 해야 나누는 슬기가 아닙니다. 바로 제 집에서 제 식구를 아끼면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얻는 슬기입니다. 아기랑, 또는 아이랑 놀면서 깨닫는 슬기입니다. 아이를 안거나 업고 동네 마실을 하며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누는 슬기입니다.
우리 곁에는 늘 슬기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슬기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한결같이 빛나는 슬기샘이 아름다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슬기샘을 못 보니, 책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거룩하거나 훌륭한 슬기자락을 붙잡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 스스로 북돋우고 키울 마음자리 슬기샘을 돌아보지 못하니, 학교를 오래 다니고 온갖 책을 두루 읽었어도 엉뚱한 샛길로 빠져들고 마는 셈입니다.
한참 책에 빠져 있는데 옆지기한테서 손전화 쪽지가 옵니다. 아차차, 시간이 너무 흘렀구나. 부랴부랴 책값을 셈합니다. 집으로 돌아갈 전철길에 읽을 책 하나를 앞가방에 쑤셔넣고 헐레벌떡 전철역으로 달려가고, 전철길에서 신나게 책을 읽은 다음, 저잣거리에 들러 식구들 먹을거리와 보리술 한 병을 사들고 잰걸음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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