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나무는 녹나뭇과에 속하는 떨기나무어느덧 봄이다. 산을 오르다보면 여기저기서 여인들의 저고리에 단 브로치처럼 노란 꽃망울을 단 나무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내겐 오래전부터 풀지 못하는 화두가 하나 있다. '왜 하고 많은 봄꽃 중에서 산수유·개나리·생강나무 꽃 등 노란 꽃이 가장 먼저 피는가?'라는 의문이다. 그 이유가 자못 궁금했다.
노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유독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그토록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노란 꽃나무들의 타고난 정직성인가. 아니면 봄이 왔다는 것을 온누리에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안면이 있는 식물학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아마도 그라면 내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마저 간단히 나를 배반하고 말았다. 그 역시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노란 꽃들의 사생활에 대한 내 탐구는 신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 것만 같다.
생강나무는 녹나뭇과에 속하는 떨기나무다. 암수 딴 그루이며 꽃이 먼저 피었다 지고 나서 비로소 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니 애절한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상사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생강나무는 우리나라 곳곳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생강나무란 이름의 유래는 잎을 따서 손으로 비빈 다음 냄새를 맡거나 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으면 생강 냄새 비슷한 향이 코를 톡 쏘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김유정 소설 속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그러나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초본식물인 생강을 사투리로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목본식물인 생강나무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생강을 '새앙'이라 부르는 전라도에선 생강나무를 '새앙나무'라고 부른다. 반면에 강을 그냥 '생'이라 부르는 지방에선 '생나무'라 부른다는 것. 이름만 놓고 따지면 생강나무는 온전히 생강에 딸린 종속변수인 셈이다.
그 밖에도 생강나무는 '아기나무''나 황매목(黃梅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생강나무와 더불어 민간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은 아무래도 '개동백나무'일 것이다.
나 어렸을 만 해도 적만 해도 여인들은 대개 머리를 감고 나면 낭자머리를 쪽져 올렸다. 그리고 머리에 슬쩍 동백기름을 발랐다. 마치 요즘 사람들 무스 바르듯이. 그렇다고 어디서나 동백기름이 흔했던 건 아니다. 동백나무는 여수 · 거제 등 남해안 지역과 제주도가 식생 한계다. 당연히 동백나무가 자랄 수 없는 북쪽지방에서는 동백기름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백나무 열매 대신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 머릿기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생강나무가 개동백나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런 연유다. 개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아마도 동백나무의 짝퉁이라는 뜻일 게다.
생강나무는 그렇게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 식물이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시 속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내겐 생강나무 하면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이 먼저 떠오른다. 사춘기 소년 · 소녀의 충동적인 애정 행각을 매우 해학적으로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붉은 동백꽃이 아니다. 노랗게 피는 생강나무 꽃이다.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라는 소설 끝 부분이 분명하게 말해준다.
몇 년 전,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 실레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다. 행정구역 상 명칭으로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 3리다. 마을이 들어앉은 형태가 마치 떡시루처럼 생겼다 해서 '찔 증(蒸)'자를 써서 증 리라고 했다. 실레마을이란 이름은 시루에서 음을 따온 것이다.
마을 앞산인 금병산 기슭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이내 생강나무 군락과 마주쳤다. 조선 단종 비(妃)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 있는 경기 남양주 사릉 부근의 생강나무 숲과 달리 이곳의 생강나무 군락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그렇긴 하더라도 소설 '동백꽃'의 약간 에로틱한 듯한 끝 장면을 떠올리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호젓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알싸한 냄새 풍기는 생강나무 숲이라니.
그곳에 서서 나는 잠시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린 점순이와 소년의 뒷일을 상상했다. 소갈머리 없이 점순네 닭을 때려죽인 소년이 되어 보기도 했다. 새삼 벌과 은총의 경계를 삽시간에 무너뜨리는 소설의 결말이 얼마나 절묘한가를 깨달았다.
지구의 여행자는 결코 내가 아니다소설뿐 아니라 더러 생강나무를 소재로 한 시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생강나무가 지닌 정취를 그럴 듯하게 묘사해낸 시는 썩 드물다. 정우영의 시 '생강나무'정도랄까.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을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 정우영 시 '생강나무' 전문
196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정우영은 1989년 무크지《 민중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는《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와《집이 떠나갔다》등을 상자했다.
이 '생강나무' 라는 시는 두 번째 시집인 《집이 떠나갔다》의 첫 장에 실린 시다. 말하자면 '서시(序詩)'인 셈이다. 서시를 읽으면 시집에 실린 시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시집《집이 떠나갔다》에 실린 시들은 거의 생태적인 상상력에 바탕을 둔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시인은 시속에서 생강나무와 자신을 비교한다. "걸어다닌 나"보다 "한 곳에 서 있는" 생강나무가 지구에 대한 기억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열등감은 천부적인 것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결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생강나무에 대한 시인의 열등감은 죽음 이후까지도 계속될 것이다. 시인이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생강나무는 지구에서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인은 아프게 깨닫는다. 진정한 지구 여행자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저 걷지도 못하는 앉은뱅이인 생강나무라는 것을. 생강나무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이 나라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 시인은 겸허해진다.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다음 순서는 겸허한 순종이 아닐까. 그리하여 시인은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그렇게 해서 대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첫 시집《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에서 우리에게 억눌리고 소외된 삶을 보듬는 온기 어린 시편들을 보여줬던 정우영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인《집이 떠나갔다》에서는 이렇게 고요하고 그윽한 생태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시로써 우리의 메마른 정신을 자연과 모성의 따뜻함으로 적신다.
시집 뒷장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분노보다는 위로에 더 눈길이 간다"라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비록 그것이 "마음이 많이 닳은" 것이든 "무뎌진" 것이라는 비판이 따를지라도 말이다. 틀린 것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는 분노하는 시를 쓰는 것이 당연하고 쓸쓸한 것이 많은 시대엔 위로하는 시를 쓰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돌아보면 우리는 쓸쓸한 것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가치를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허함은 일종의 지병이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도 한 생애요, 저렇게 살아도 한 생애라는 끔찍한 자괴감이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건 아닌지. 그 잃어버린 가치 가운데는 생태적 가치도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산기슭 생강나무들이 안타까운 듯 우리를 바라보며 자꾸만 손짓한다. 어서어서 자신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라고.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행복한 시간을 누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