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내 마누라가 제일 무섭거든. 나한테 화낼까봐 무섭고, 때릴까봐 무섭고, 욕할까 무섭고. 이혼하자고 할까봐 무섭고. 나한테 실망할까봐 무섭고. 나 만난 걸 자기 인생의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할까봐 무섭고."현대판 '온달' 온달수(오지호)가 '평강공주' 천지애(김남주)를 무서워하는 이유다. 7년간의 백수 생활이 무안해서, 극심한 불황에 이혼 당할까봐, 우리의 온달수는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렇다면 '평강공주'는 천하태평이냐고? 첫째 며느리만 간장 게장을 싸주는 시어머니는 야속하고, 돈자랑 하는 친구들도 얄밉고, 7년간 고작 천만 원도 못 벌어다 준 남편 온달수는 더 밉다. 그래서 열 일 제쳐 두고 본인이 직접 나섰다.
남편에게 간만에 들어온 취직자리인 '퀸즈 푸드'. 라이벌이 인사부장 조카라지만, 연봉 센 대기업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으랴. 이제부터 '평강공주' 천지애의 온달 남편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16일 첫 방송을 시작한 <내조의 여왕>은 이렇게 극성 아줌마의 활약을 감칠맛 나게 그린다. 그리고 김남주가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약삭빠르게 내조의 달인으로 거듭나는 천지애를 연기한다. 세련된 이미지의 대명사였던 김남주가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해 제대로 망가졌다.
억척녀 천지애, 캐릭터가 살아 있다
<내조의 여왕>은 개별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코미디다. 물론 그 중심은 억척스런 아줌마로 거듭난 현대판 '평강공주' 김남주다. 김태희 뺨치는 외모를 무기 삼아 서울대 출신이자 '멘사' 회원인 온달수를 낚아챈 우리의 주인공 천지애. 하지만 조직과는 맞지 않는 낙천가 온달수는 백수로 전락하고, 이런 남편을 성공시키고자 천지애는 <하얀거탑>의 장준혁도 울고 갈 로비와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먼저 남편의 입사를 좌지우지할 '퀸즈 푸드' 이사 사모님 오영숙을 휘어잡을 것. 천지애는 고교 시절부터 닦아왔던 패션에 대한 안목으로 백화점에서 오영숙에게 접근하는 데 일단 성공한다. 장준혁 뺨칠 정도의 로비 실력으로 여타 아줌마들을 제치고 오영숙의 호감을 사기 시작하고, 급기야 남편 온달수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백치미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지애의 고군분투가 코믹하게 그려진다. 특히나 <꽃보다 남자> 구준표에 버금가는 무식한 언변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
"아, 카드 마그네슘이 손상됐나 봐요." "나침반은 던져졌는데." "원래 잘난 사람들은 튀게 돼 있어. 군대일학이라고 하잖아.""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죠. 인생사 다홍치마라는데…."특히나 천연덕스럽게 이런 멋쩍은 대사를 읊어대는 김남주의 연기 변신은 말 그대로 '군계일학'이다. <환상의 커플>에서 입증된 오지호의 순수한 듯 멍한 연기 또한 김남주의 억척스러움과 더불어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
명확한 대결구조가 유발하는 웃음그러나 여기서 그쳤다면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로 그쳤을 터. <내조의 여왕>은 확실한 라이벌 구도를 통해 천지애와 온달수의 고생담을 엮어내며 웃음을 유발한다. 그 주인공은 천지애가 잘나가던 학창시절 각각 첫사랑과 '시녀'와 같은 친구로 만났던 퀸즈푸드의 부장 한준혁(최철호)과 그의 아내 양봉순(이혜영)이다.
한준혁은 미팅에서 만난 천지애에게 한눈에 반해 순정을 바쳤던 인물. 그러나 천지애를 질투한 못난이 양봉순의 계략에 넘어가 결혼까지 하고, 천지애에 대한 애증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양봉순은 성형수술로 거듭난 뒤 우아한 사모님으로 변모했지만 아직까지 지애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득 찬 상태다.
<내조의 여왕>은 첫 회 오프닝에서 30대 중반 김남주와 이혜영에게 고등학교 교복을 입히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과거사를 친절하게 설명한 바 있다. 10여 년 전엔 공주와 시녀였지만,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게 된 천지애와 양봉순의 갈등을 전면에 배치하겠다는 의도다.
초반부에선 이렇게 양봉순이 사사건건 천지애를 괴롭히고 곤경에 빠뜨리는 에피소드가 매회 펼쳐지고 있다. 4회 후반부, 양봉순은 천지애가 오영숙에게 '짝퉁' 명품을 선물한 것을 알아채고, 음료수를 쏟아부어 기어이 천지애를 골탕 먹이는 식이다. 더불어 한준혁 또한 천지애에 대한 애증으로 인해 인턴 사원으로 입사한 온달수를 핍박하고 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이 온달, 평강공주 커플과 로맨스를 벌이게 될 퀸즈푸드의 사장 부부 은소현(선우선), 현태준(윤상현)의 활용 여부다. 각기 대학 선후배와 교통사고 피해자와 가해자로 온달수, 천지애와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은 애정 없는 정략결혼으로 위기를 맞게 된 부부로 설정되어 있다.
은소현은 의도적인 하룻밤 불륜 상대로 온달수를 유혹하려고 있고, 현태준 또한 묘한 매력의 천지애에게 의중 모를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사각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한계선을 넘는다면 또 하나의 '막장'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줌마 김남주, 더 망가져주시길일단 <에덴의 동쪽>의 후속이었던 <내조의 여왕>은 <꽃보다 남자>와 대적해 첫 회 10% 시청률을 기록하는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김남주의 교복을 입은 발랄한 자태와 대기업 사모님에게 한껏 아양을 떠는 코믹한 변신이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다. 진짜 남편 김승우 또한 카메오 출연하며 아내 김남주의 드라마 복귀를 응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꽃남' 열풍에도 <내조의 여왕>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1회부터 캐릭터들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1회부터 타고난 외모만 믿고 짖고 까불었던 천지애나 그에게 핍박받던 양봉순의 과거 대결구도를 명확히 해 코믹 드라마로서 기본 전제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대기업 이사 사모님을 둘러싼, 과장됐지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로비 현장이나 온달수의 비굴한 취업 성공기 등 우리 시대의 우울한 풍경도 적절한 수준에서 코미디로 승화된다. 캐릭터도 상황 설정도 살아 있는, 볼 만한 코미디가 간만에 등장했다.
물론 일등공신은 김남주다. 오랜만에 TV에 복귀해 "나도 아줌마다"라며 레깅스 입고, 술 취한 연기도 곧잘 보여주며, 여배우가 아닌 생활인다운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줌마로 변신을 꾀한 김남주여, 부디 좀 더 망가져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