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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무죽죽한 돌담길은 '놀멍(놀며)' 걸었습니다. 봄바람 넘실대는 청보리 길은 '쉬멍(쉬며)' 걸었습니다. 푸석푸석한 흙먼지 길은 '비우멍(비우며)' 걸었습니다.

 

2009년 3월 28일, 드디어 제주올레 12코스가 길을 열었습니다. 당초 제주시종합경기장에서 오전 8시 40분에 출발하려던 제주올레 버스는 너무 많은 올레꾼들이 모이는 바람에 버스 부족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가까스로 10시가 돼서야 추가로 버스 3대가 투입됐습니다. 아쉽게도 올레꾼 130여 명은 옛 신도초등학교 교정(도자기체험 문화공간)에서 제주올레 걷기가 시작됐습니다.

 

 

축복받은 땅 서귀포 신도리, 수평선 올레 속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모인 올레꾼 인파는 서귀포시 대정읍 남서쪽 올레를 울긋불긋 물들이더군요. 춘분이 지났건만 신도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왜 그리도 차가웠던지요. 역시 대정골의 바람은 장난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느슨했던 올레꾼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순간이었지요.

 

제주도가 화산섬이라지만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는 토지가 비옥한 편입니다. 따라서 신도리 마을은 축복받은 땅이지요. 사방이 평야인 신도리 마을의 자원은 밭농사. 이곳은 풋마늘과 양파, 감자가 소득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봄이 되면 신도리는 겨우내 농부들이 가꾸어 놓은 풋마늘과 양파, 그리고 보리가 평야를 이룹니다. 그렇다보니 그 평야의 끝은 수평선을 연상케 했습니다. 제주올레 12코스는 풋마늘 밭을 지나 양파 밭을 가로질러 보리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들녘은 광활한 평야를 이뤘습니다.

 

 

 

흙길 밟아보는 마늘밭 올레

 

옛 신도초등학교 교정은 도자기체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더군요. 표정이 살아 있는 도자기체험 문화공간에서는 올레꾼들을 위해 지역주민들이 따뜻한 커피와 쑥버무리를 제공했습니다. 오전 11시 10분, 시골 마을 따뜻한 인심을 뒤로하고 오른쪽 올레로 접어드니 풋마늘 밭입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늘밭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인심 같았습니다. 마늘밭을 에워싸고 있는 돌담이 굽이굽이 경계선을 이룹니다.

 

마늘밭의 올레 넓이는 1.5m 정도 될까요. 그 길은 흙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흙길입니다. 이제 제주올레는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대부분이지요. 농부들의 이동과 물건 운반을 수월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지요. 마늘밭 올레는 경운기 한 대가 간신히 왕래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평소 이 길은 농부들만 걷는 올레였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2000명이 넘는 올레꾼들이 흙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꽁보리밥을 추억하며 걷는 보리밭 올레

 

20분쯤 걸었을까요. 마늘밭 주변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 보입니다. 형형색색 모여 앉은 지붕이 돌담이 마치 초원의 나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돌담 아래엔 광활한 보리밭이 펼쳐졌습니다.

 

"이건 보리 아냐?"

 

바람에 넘실대는 푸른 보리를 보고 동행한 제주토박이 친구가 말문을 엽니다.

 

신도리 평야는 겨우내 언 땅에서 자란 보리가 평야를 이뤘습니다. 이 풍경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갔더라면 눈에 띄지 않을 풍경이었겠지요. 제주토박이 친구에게 신도리 올레는 30년 전 기억 속 올레입니다.

 

"제주 보리는 눈물의 주식이었지! 지금이야 꽁보리밥이 별미이고 웰빙음식이지만…."

 

제주도 중산간이 고향인 또 다른 토박이 친구도 보리밭 올레의 추억을 더듬습니다. 그녀에게 보리밭 올레는 눈물의 올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곤밥(쌀밥)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어! 할아버지는 곤밥(쌀밥) 주시고, 아버지는 반직이밥, 그리고 우리는 늘 꽁보리밥이었지!"

 

그녀의 말투는 가난했던 올레를 더듬는 듯했습니다.

 

 

꿈과 희망을 주는 마을 안길 올레

 

추억이 살아 있는 신도리 보리밭 올레를 벗어나자 마을 안길, 삼거리에 서 있는 마을의 고목나무와 농사의 운반수단인 경운기도 올레꾼들과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돌담 너머에 핀 동백꽃이 3월을 지키더군요. 이렇듯 신도리 올레는 고향 같았습니다.

 

마을 안길로 접어드니 돌담에 걸린 화려한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띕니다. 세계무대를 재패한 프로골퍼 양용은 생가. 돌담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이곳 주민들에게 야무진 꿈과 희망을 제공했겠지요. 어린 시절 프로골퍼가 걸었을 올레를 걷다 그의 생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작은 마당 한쪽에 피어 있는 화분 서너 개가 올레꾼을 맞이합니다. 프로골퍼의 집에도 소박한 봄이 피어났습니다.

 

 

봄을 캐는 올레, 사람 냄새 느끼다

 

양파 밭 올레 두둑에도 봄이 피어났습니다. 야생화와 쑥 군락이 올레꾼들을 맞이합니다. 올레꾼들, 나풀거리는 쑥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요. 성급한 올레꾼은 두둑을 넘어서 쑥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알맹이를 키워왔을 감자도 하우스 구멍을 뚫고 봄을 맞이했습니다. 양파 냄새, 쑥 냄새가 버무려진 신도리 올레는 봄 냄새로 가득하더군요. 아니면 이 풍경이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니었던가요?

 

"속암수다!"

 

주먹만한 양파를 캐는 마을 아낙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손님들에게 인사를 나눕니다. 제주도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지요. '수고하십니다'라는 말보다 그 무엇의 정겨움이 묻어 있지 않습니까? 길을 걷는 올레꾼들이 무슨 '속을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올레꾼의 마을을 알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올레를 걷는다는 것은 일상이었겠지만, 도심사람들에게 올레는 추억이 묻어 있는 길이라는 것을.

 

 

 

'비우멍' 걸었더니 풍요로워지더라

 

들녘에 자리 잡은 묘지도 올레꾼들에게는 제주도 문화를 체험하는 자원입니다. 서너 평 남짓한 땅에 누렇게 유채꽃이 만발하니 돌담과 어우러진 묘지가 평화롭습니다. 산자와 죽은자의 터가 그야말로 서귀포시 신도리 올레더군요.

 

이렇듯 1시간 30분 동안 걸었던 신도리 올레는 사색하며 걸었더니 푸른 희망 넘실대고, 비우멍 걸었더니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길이었습니다. 특히 파도처럼 출렁이는 보리밭 올레는 추억의 길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28일, 제주올레 12코스가 길을 열었습니다.

제주 올레 12코스는 무릉2리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평지교회-신도연못-녹낭봉-(구신도초교)-고인돌-도원횟집-신도 앞바다-수월봉-엉알길-자구내 포구-당산봉-생이기정 바당길-용수포구(절부암)으로 약 17.6km 입니다. 소요시간은 5-6 시간 정도.
 
제주올레 12코스 기사는 추억의 신도리 올레를 시작으로, 환상의 신도 바당 올레, 태고의 숨소리가 들리는 엉알길 올레, 조망이 아름다운 당산봉, 가을이 출렁이는 생이기정 바당길을 연재하겠습니다.


#신도리 올레#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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