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많이 길어졌다. 퇴근하면 사방이 어둑어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해 떨어지는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퇴근길. 따사로운 햇살이 좋고, 밝음이 길어져서 참 좋다. 집에 도착했는데도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 멀었다.
옆집아저씨 손에는 전지가위가 들려있다. 유실수 가지치기를 하시는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요샌 밭에서 할 일도 없을 텐데…."
"머리가 무거워서 그냥 나왔어요."
"머리가 무거우면 쉬어야지!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또 밭으로 나와!"
"흙냄새 맡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걸요."
일흔을 넘기신 아저씨도 방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밭에 나와 뭔가를 꼼지락거리면 머리가 맑아지는 조화는 뭘까? 봄바람에 실린 따스한 볕에서 일을 하면 잡념도 없어지고, 몸도 개운해진다. 텃밭에 나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이 나는 참 좋다.
봄엔 풀 속에도 나물이 있다
우리 밭에도 새봄 들어 푸른 것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겨울을 버티어낸 작물들이다. 말라비틀어진 것들이 어느새 부쩍 자랐다. 질긴 생명력이 느껴진다. 쪽파, 대파가 한 뼘 넘게 컸다. 머위도 새순이 흙 밖으로 나왔다. 부추도 무거운 흙을 뚫고 고개를 쳐들었다. 꽃샘추위에 화들짝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더덕 싹. 코딱지만한 더덕밭에도 여린 새순이 눈을 비비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내는 며칠 전, 더덕 새싹을 보고 말하였다.
"여보, 더덕 새움을 보니 가슴이 떨려! 참 고맙기도 하죠. 누가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봄기운을 알아차렸을까? 자연 앞에 겸손 또 겸손이야!"
질긴 생명력은 어디 그것뿐이랴. 봄기운을 안 풀들도 여기저기 길게 목을 뺐다. 자연의 오묘한 이치가 새삼 놀랍다.
'오늘은 요 녀석들이나 사냥해볼까?'
호미를 들었다. 봄기운에 이름모를 풀들도 힘찬 기지개를 펴는 듯싶다. 지금 눈에 띄는 풀은 대개 뿌리가 길다.
잡초 속에서 봄나물이 보인다. 냉이랑 쑥이 섞여있다. 민들레도 보인다. 달래도 가느다랗게 올라왔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소중한 먹을거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미나리꽝'을 만들어볼까?
풀을 뽑고 나물을 추리는데 옆집아저씨가 건너왔다. 막걸리 한 통을 들고 왔다. 곁들이 생각이 나셨나?
"어! 이 집 밭고랑에 돌미나리가 이렇게 많아?"
"그래요? 언제 올라왔지! 그곳은 작년에도 미나리가 자랐던 곳인데…."
"아직은 자잘하구먼! 요 녀석들 캐서 미나리꽝이나 만들지?"
"미나리꽝이요?"
"수반에 흙과 물을 조금 채운 뒤 묻어두면 미나리꽝이지 다른 게 미나리꽝인가!"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습한 밭고랑에 돌미나리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잡초로 취급할 뻔한 것들 중에서도 소중한 나물은 있는 것이다. 밭고랑에 아무렇게 자란 돌미나리가 귀한 대접을 받을 것 같다. 밭을 갈아엎으면 기계에 깔아뭉개질 게 뻔한 것들인데도…. 미나리를 키워 잘라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참 좋다.
간단하게 미나리꽝을 만들어볼까? 우리 집에는 수중식물을 길렀던 수반이 하나 있다. 물양귀비도 기르고, 어리연꽃도 길렀다. 그간 관리를 잘못해 죄다 죽이고, 작년에는 장난삼아 벼 몇 포기를 심어보았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수반에다 돌미나리를 심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아직 미나리 키가 작다. 어린 새싹이 축축한 밭고랑에서 엎드린 채 자라고 있다. 찬바람을 견디며 용케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이 경이롭다.
호미로 미나리를 캤다. 뿌리가 길다. 아마 겨울을 이겨낸 비밀은 뿌리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더디게 일을 하는 내가 못마땅한지 아저씨가 채근이시다.
"그렇게 일을 하다 어느 세월에 마치려고! 미나리는 뿌리에 흙이 붙어있지 않아도 죽지 않아. 뿌리에 물만 있어도 크는 것을 가지고선!"
아저씨는 가져온 막걸리를 나눠먹고 싶은 마음이 앞선 모양이다. 아저씨 재촉에 마음이 급하다.
수반에 황토를 넣고 잘 썩혀둔 깻묵을 섞었다. 그리고 모내기 하듯 미나리를 한 뿌리 한 뿌리를 심었다. 촘촘히 심고선 목이 잠길 만큼 물을 채웠다.
아저씨와 함께 먹은 막걸리 한 잔에 갈증도 풀리고 기분도 좋아진다.
미나리는 나물로도 좋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우리 식구는 미나리를 참 좋아한다. 야채 쌈과 함께 날로도 먹는다. 살짝 데쳐 조물조물 무쳐먹는 미나리나물은 그 향이 좋다. 나물을 무칠 때는 향을 살리려고 밑간만 해서 먹는다. 생선찌개를 끓일 때 미나리는 약방의 감초 격이다. 무엇보다 생선회와 함께 버무려먹는 미나리무침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특히, 홍어회를 미나리를 데쳐 새콤달콤하게 무쳐먹으면 미나리 향과 씹히는 맛은 으뜸이다.
미나리는 맛도 그만이지만 영양도 만점이다. 성질은 매우 차다고 한다. 술을 마신 뒤 먹으면 숙취해소와 함께 간 기능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머리를 맑게 하고 중금속 해독작용에 좋다는 것이다.
저녁 늦게 들어와 미나리꽝 만들어놓은 것을 못 본 아내가 출근하는 나를 배웅하며 미나리 수반을 보더니만 호들갑이다.
"미나리를 나물로도 먹고, 나중 미나리꽃도 보겠네!"
"당신이 미나리꽃을 알아?"
"작년 풀숲에 핀 미나리꽃 보았잖아요? 하얀 꽃!"
"당신이 그걸 기억하네. 올해 미나리꽝은 당신이 차지하겠어!"
아내가 미소를 짓는다. 생각지도 않은 일로 해서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리라.
미나리꽃은 보통 한여름에 핀다. 부추꽃처럼 하얗고, 생김새도 비슷하다. 건성으로 지나칠 때와는 달리 가까이 들여다보면 순백색의 꽃이 참 예쁘다.
미나리는 키우면서 여러 차례 잘라먹는다. 향긋한 맛과 질감으로 입을 즐겁게 한다. 잎이 세서 사람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어 마음을 화사하게 한다.
아침저녁으로 미나리 커가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봄기운이 완연하면 하루가 다르게 자랄 것이다.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내가 만든 미나리꽝을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공연스레 출근길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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